Institute of Youngnam Culture Research

top

영남문화산책

홈 > 열린마당 > 영남문화산책

작성자 영남문화연구원   |  등록일 16-03-10 16:11   |  조회 1,426회

제52호: 선덕여왕 이야기 (2)

본문

​​

 선덕여왕이 여성으로서 최초로 왕위에 오르게 된 명분을 둘러싸고서 학계에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어 왔다. 기록에 따르면 선덕이 즉위하게 된 명분은 성골남진(聖骨男盡)’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선덕여왕의 즉위 당시를 기준으로 생존한 성골의 남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성골이란 무엇인가가 문제로 되겠다. 성골은 선덕의 아버지 진평왕이 자신 가계의 직계존비속(直系尊卑屬)을 다른 귀족들과 차별화하여 신성시한 데서 나온 특별한 골품이다. 이들은 순수한 혈통을 유지해 가기 위해 3촌까지도 결혼 가능한 극심한 근친혼을 행하였다. 즉위 전 선덕도 자신의 삼촌과 혼인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진평왕에게 두 사람의 형제가 있었지만 그가 54년이라는 장기간 재위하는 동안 모두 사망하였고 후사로는 아들은 없이 딸만 셋이었다. 따라서 진평왕에게는 가까운 혈연관계로서 성골의 범주에 들어갈 남자가 없어 장녀인 선덕이 왕위를 계승하게 된 것이다.

  <?xml:namespace prefix = o />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최초의 여왕이 출현하는 데 대한 설명으로는 불충분한 측면이 엿보인다.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다면 그런 명분을 구차스럽게 붙일 필요조차 없고 또 아무런 반발도 없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미 진평왕 말년 신라 최초의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유력한 귀족인 이찬 칠숙(柒宿)과 아찬 석품(石品)은 선덕의 왕위 계승 추진에 불만을 품고 모반을 일으키려 하였다. 사전 발각으로 실패하였지만 이는 여왕의 즉위를 반대하는 분위기가 널리 퍼져 있었음을 뜻한다. 이 사건은 선덕의 즉위가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진평왕이 강력한 힘으로 밀어붙이면서 명분으로 내세웠던 것이 바로성골남진이었다.

 

 선덕은 즉위하게 되었지만 순탄하지는 않았다. 그를 반대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지만 지원하는 세력도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그 두 세력 사이에 마침내 적절한 타협이 이루어져 비로소 선덕여왕은 왕위에 오를 수가 있었다. 여왕을 반대하는 일파에 대해서는 차기의 왕위계승에 가장 근접해 있는 직책인 상대등을 내어줌으로써 일단 무마하였다. 말하자면 선덕여왕의 즉위는 지지파와 반대파의 타협의 산물이었다. 그래서 이후에는 서로 견제해 가면서 균형을 유지하는 형국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선덕여왕은 균형을 깨트리는 데 영향을 미칠만한 새로운 시책을 펼 수 없었다. 대신 가장 많은 수의 사찰을 건립하는 등 불사(佛事)을 널리 행하였는데 이는 내적인 대동단결을 도모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선덕은 나이 탓도 잇지만 끊임없는 내분으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몸과 마음이 편치 않았으며 줄곧 병에 시달렸던 것 같다. 그래서 의약을 동원하고 기도를 올렸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국가 사찰인 황룡사에 승려들을 모아서 불경을 강론하기도 하고 100명을 승려로 출가시키는 것을 허락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녀의 재위 기간은 안팎으로 위기상황을 맞고 있었다. 그로 말미암아 왕위도 심히 불안정하였던 것이다. 과연 재위 17년째 되던 해(647)에는 상대등으로 있던 비담이 왕위를 노려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김춘추와 김유신 등 왕당파 주도로 결국 진압되었지만 그 와중에 선덕여왕은 사망하고 말았다. 이로써 새로운 시대가 열릴 발판이 마련되었다. 선덕여왕은 한국사 최초의 여왕이었지만 반란을 거쳐 즉위하고, 마침내 반란 속에서 일생을 마감한 비운의 인물이었다.

 

주보돈(경북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