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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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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남문화연구원   |  등록일 16-03-10 16:08   |  조회 1,668회

제49호: 국어사의 자취로 본 ‘비슬산’의 어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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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에는 두 개의 명산이 있다. 하나는 북쪽의 팔공산이요, 다른 하나는 남쪽의 비슬산이다. 팔공산은 신라시대 오악 가운데 하나로 숭앙받았고, 후삼국 시기엔 왕건과 견훤의 싸움터로, 오늘날엔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는 갓바위 미륵불의 영험함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반면에 이에 못지않은 비슬산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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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슬산은 대견봉(1,084m)과 조화봉(1,058m)을 중심으로 서남쪽으로 휘어진 주맥과 대견봉에서 흘러내린 한 자락이 북동쪽으로 달려 앞산을 만들고 다른 한 자락은 동쪽으로 흘러 가창면과 청도군을 나누는 두 개의 지맥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가면을 감싸 안은 주맥은 짧은 반면, 앞산과 병풍산으로 흐른 지맥은 길어서 산의 전면은 높고 험난한 바위산이나 뒷면은 완만한 경사지를 이룬다. 따라서 유가면, 현풍면, 논공면에서 바라보는 주산은 장엄하면서도 수려하지만 가창이나 청도 쪽에서 보면 웅장하면서도 여유롭다. 산이 커서 골이 깊고 세가 수려하여 고대에는 신앙의 중심지였고, 임진왜란 때는 의병들의 본거지가 되었다. 6.25동란 때는 낙동강 방어의 배후가 되었고, 오늘날에는 인근 사람들의 식수공급원(가창댐)이자 휴식처가 되고 있다. 더욱이 부근 사람들에게는 눈을 뜨면 들어오는 일상의 한 배경이다.

 

 이처럼 친숙한 비슬산이지만 그 이름의 유래는 허황하기 그지없다. 현재 인터넷을 통해 알려진 유래담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포()수목에 덮인 산이란 뜻을 가졌는데 이의 인도어를 비슬(琵瑟) 또는 소슬(所瑟)로 적은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이것은 삼국유사<포산이성>조의 기록과 <비슬산용연사중수비>(1722)의 기록에 근원을 둔 것이다.

 둘째는 천지개벽시 온 세상이 물에 잠겼을 때 솟아오른 바위에 배를 매었는데 그 형상이 비둘기를 닮아 비들산이라 부르던 것이 비슬산으로 변화된 것으로 보는 설이다.

 셋째는 산의 모습이 거문고와 닮아서 비슬산이라고 하였다는 설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설화를 기반한 민간어원설이나 후대 오기된 것의 해석 또는 한자표기에 형세를 견강부회한 설들이다. 그래서 필자는 국어사의 지식과 산의 형세를 바탕으로 명칭의 유래를 찾아보려 한다.

 

 현존 최고의 기록은 삼국유사소슬산(所瑟山), 포산(包山)’이며 그 다음이 소재사향완대좌(消災寺香?臺座1358)에 새겨진 비슬산(毗瑟山)’이다. 이로 보면 13세기말~14세기 중엽엔 한자명 포산(包山)을 고유어는 琵瑟山, 毗瑟山, 所瑟山으로 적었음을 알 수 있다. ‘싸다는 의미로 중세어엔 ‘?로 적혔다. 따라서 포산(包山)은 중세어로 본다면 ‘?(?- + -# )’가 되는 셈이다. 국어사에서 중세어의 은 이전 시기 아래 있던 약모음이 탈락하여 후행하는 과 결합한 결과로 보는 바, 여기에 의지한다면 琵瑟山, 毗瑟山, 所瑟山15세기 ‘?의 이전 어형을 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琵瑟毗瑟을 간직한 동음이라 문제가 없지만 所瑟은 음가가 너무 상이하여 의아해 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 ‘?’를 표기하던 훈차자였음을 보면 유사성을 볼 수 있다. 결국 표기로는 비슬’, ‘?이 되는 셈이다. 동일한 지명이 ‘?’로 달리 적힌 것은 실제 고유어를 그대로 옮길 한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 ‘?’와 가깝고 약모음이라 후대 탈락할 수 있으면서 한자에 없는 음이라면 를 가정할 수 있다. 따라서 琵瑟山, 毗瑟山, 所瑟山은 우리말 브슬뫼를 최대한 가깝게 표기하려는 노력에서 생긴 혼란이라 이해할 수 있다.

 

 비슬산이 크고 넓게 분포하지만 유가면을 둘러싼 주산이 가장 뚜렷하며 형세 또한 현내벌(DIGIST 현장)을 안고 있는 소쿠리 형상이다. 따라서 지역민들은 산의 형세를 따라 감싸안은 산브슬뫼로 부른 것이 아닌가 본다.

 

  저자: 이장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