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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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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남문화연구원   |  등록일 16-03-10 15:23   |  조회 1,782회

제8호: 이상화, 파계사에서 영원을 보다

본문

​​ 대구 출신의 시인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의 하나로 이상화를 꼽는 데 주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상화 시인은 등단 초기인 1924년에 파계사를 소재로 ?지반정경(池畔靜景)-파계사 용소(龍沼)에서?를 쓴 바 있다. ‘지반정경이란 연못가의 고요한 풍경이란 뜻이다. 이 시에는 이상을 꿈꾸는 낭만주의자로서의 그의 모습이 잘 담겨 있다. 이 작품을 통해 그의 시 세계의 핵심을 읽는 일이 대구 지역에 연고를 둔 사람에게 각별한 느낌을 줄 것으로 생각하여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분량상 뒷부분만 인용한다). 

 

물 위로 죽은 듯 엎디어 있는

끝도 없이 열푸른 하늘의 영원성(永遠性) 품은 빛이,

그리는 애인을 뜻밖에 만난 미친 마음으로,

내 가슴에 나도 몰래 숨었던 나라와 어우러지다.

 

나의 넋은 바람결의 구름보다도 연약하여라

잠자리와 제비 뒤를 따라, 가볍게 돌며

별나라로 오르다 갑자기 흙 속으로 기어들고

다시는, 해묵은 낙엽과 고목의 거미줄과도 헤매이노라.

 

저문 저녁에, 쫓겨난 쇠북소리 하늘 너머로 사라지고, 이 날의 마지막 놀이로, 어린 고기들 물놀이 칠 때

내 머리 속에서 단잠 깬 기억은 새로이, 이곳 온 까닭을 생각하노라.

이 못이 세상 같고, 내 한 몸이 모든 사람 같기도 하다!

, 너그럽게도 숨막히는 그윽일러라, 고요로운 설움일러라.

 

- 이상화, ?지반정경(池畔靜境)-파계사 용소(龍沼)에서? 부분

 

 현실에서 영원을 꿈꾸는 낭만주의자 이상화는 파계사의 용소에 비친 하늘빛에서 영원성을 읽어낸다. 그러나 그 영원성은 시인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이상(“내 가슴에 나도 몰래 숨었던 나라”)과 어우러지는 세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시인은 파계사의 용소에서 이상과 현실의 공존을 읽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영원성이 지상에 발을 디딘 인간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경지가 여기에 담겨 있다.

 

 시인이 말하였듯이 인간의 넋이란 바람에 떠도는 구름보다 연약한 법이다. 어느 순간 별나라를 꿈꾸다 어느 순간 진흙탕 속에 처박히기도 하는 것이다. 이 종잡을 수 없는 삶 속에서도 깨달음의 순간은 오는 법, 바로 그 깨달음이 파계사의 연못에서 이루어진다.

 

 파계사에서 울리는 저녁 쇠북소리도 사라지고 용소에 물고기가 물놀이 칠 때, 그 고요함 속에서 시인은 절에 온 까닭을 생각하며 이 못이 세상 같고, 내 한 몸이 모든 사람 같기도 하다!”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용소라는 연못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담은 우주로 확장되는 순간, 그 연못 앞에 선 시인은 모든 사람과 일체가 된다.

 

 파계사 연못에서 시인은 세계와 일체가 되는 낭만주의자가 된다. 이것은 파계사의 역사적 이력과도 연결이 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파계사는 영조의 신비한 탄생설화와 관련되어 있는데, 이 역시 자아와 세계가 시공의 한계를 넘어서서 일체가 되는 세계관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이상화가 자신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데 이곳이 적격이었는지 모른다. 한번쯤 파계사 연못에서 그 신비한 일체감, ‘너그럽게도 숨막히는 그윽고요로운 설움을 느껴볼 일이다.

 

박현수(시인,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