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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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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남문화연구원   |  등록일 16-03-10 15:17   |  조회 1,683회

제4호: 약령시 열리는 대구, 그 속의 문학

본문

​​대구에서 

   -유치환

 

동지 가까운 경북 대구의 거리는 흐리어

사람마다 추운 날개를 가졌다

 

일찍이 나의 아버님께선 해마다

고향의 앞바다 빛깔이 유난히 짙어 차갑게 빛날 때면

밤일수록 슬피 우는 윤선을 타고

나의 알 수 없는 먼먼 영()으로 가시고

가랭이 탄 바지 돌띠 띤 나는

수심하는 어머니 반짓고리 곁에 놀며

어머니와 더불어 손꼽아 기다렸느니

젊은 아버지는 이렇게

이곳 낯설은 거리에 내려 추운 날개를 하고

장기(帳記)를 들고 당재(唐材) 초재(草材)를 뜨셨던구나

 

내 오늘 장사치모양 여기에 와서

먼 팔공산맥이 추녀 끝에 다다른 저잣가 술집 가겟방에 앉아

요원한 인생의 윤회를 적막히 느끼었노라.

 

 

 유치환 시인의 아버지는 통영에서 한약방을 하였기에 한약재를 구하려 대구에 자주 다녀갔나 보다. 어린 아들은 어머니 곁에서 아버지를 그리워하였던 모양이다. 먼먼 곳으로만 생각되던 대구, 그곳에 섰을 때 시인의 마음에는 얼마나 많은 느낌들이 부침했을 것인가. 그리고 요원한 인생의 윤회를 느끼며 먼 팔공산맥이 추녀 끝에 다다른술집에 앉아 몇 잔의 술을 비웠을 것인가. 이 시에는 약령시라는 대구의 풍속과 생활이 녹아 있어 우리에게 남다른 감동을 준다.

 문학 속에 등장하는 대구는 이처럼 약령시(藥令市)와 관련을 맺고 있다. 지절의 시인 이육사도 이 약령시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19321월 조선일보에 ?대구의 자랑 약령시의 유래?라는 장문의 기사를 쓰고 있다. 이 글은 그가 조선일보 대구 지국 기자로서 쓴 첫 기사로 알려져 있다. 거기에는 영시가 개설되면 동성정 입구로부터 남성정 입구까지 십여 정에 뻗쳐 당재, 초재 등 삼백여 종의 약품이 진열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치환 시인의 시에 나오는 먼먼 영()”은 이 영시(令市)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육사에 따르면 이 약령시는 조선 효종조에 황실에서 쓸 약품을 대구에서 구하고자 국가의 명령으로 시장을 연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약령이 서면 감사가 약재를 골라 봉하여 중앙정부 사약원(司藥院)에 보낸 후에 팔도에서 모여든 한의사들이 사갔다고 한다. 다소 위축되긴 했지만 대구 약령시는 지금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전국의 좋은 약재가 모두 모인 이 곳에 좋은 문학도 많이 태어났다. 문학은 아픈 마음을 치료하는 약재이니 약전골목 어딘가에 문학이라는 약초도 하나 놓여 있을 만하다. 그러고 보면 문학치료학이라는 학문이 우리 대학에 있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지금도 혹 대구역 광장에 서서 길 잃은 듯 주위를 둘러보는 낯선 사람이 있다면, 약전골목 어디쯤 주점에 홀로 앉아 초점 잃은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면 알 수 없는 오랜 인연으로 이곳에 닿은 누군가라 생각하고 그의 추운 날개를 한 번 따뜻하게 바라보아야 하리라. 그가 또다른 유치환 시인이 아니라 누가 장담할 것인가.

 

박현수(시인,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