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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남문화연구원   |  등록일 16-03-10 15:58   |  조회 1,800회

제40호: 역사를 간직한 사찰 부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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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란을 통하여 이미 지적해 둔 사실이지만 팔공산은 과연 양적으로는 물론이고 질적으로도 한국 불교문화유산의 보고(寶庫)라 할 만하다. 비로봉을 중심으로 동서로 길게 병풍처럼 펼쳐진 산자락 곳곳에 산재하는 사찰의 수는 수백 개에 이른다고 한다. 역사와 전통을 간직하여 유서 깊다고 널리 알려진 사찰로서는 동화사, 은해사, 파계사, 송림사, 갓바위(선본사), 부인사 등을 대충 손꼽을 수 있다. 그 가운데 이번에는 부인사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한다.

 

 부인사는 다른 사찰에 비하여 대구시민들에게 그 존재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아마도 신라 선덕여왕을 추모하는 숭모제가 매년 행해지는 사찰이라는 정도로만 소개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사실 부인사가 선덕여왕과 관련을 맺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로서 모르긴 하여도 부인(夫人)이라는 이름에 근거를 둔 데서 비롯한 것 같다. 이제는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사찰 자체가 선덕여왕에 의해서 창건된 것으로까지 믿고 싶어 하는 경향이 뚜렷이 보인다. 그렇지만 부인사가 선덕여왕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볼 수 있는 믿을 만한 기록은 어디에도 찾아지지 않는다.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걸쳐 몇 차례 발굴이 시행된 결과(우리 대학 박물관도 참여한 적이 있음) 부인사의 창건 시점을 선덕여왕이 왕위에 있던 7세기 중엽까지 소급해 볼 자료는 단 한 점도 출토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보아 아무리 올려도 8세기 후반 이전으로 잡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사실 여왕을 부인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으므로 사명(寺名)을 근거로 선덕여왕이 창건하였다고 보는 것은 적절하지가 못하다. 그런 약점을 간파하고서 이 부인이 선덕여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인 마야부인(摩耶夫人)으로서 그녀를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였을 것이라는 새로운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물론 이 또한 아무런 근거가 없는 한갓 주장일 따름이다. 창건의 연대를 올려보려는 시도는 부인사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널리 자행되고 있는 행태이다. 오로지 많은 신도를 확보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에서 실제와는 전혀 상관없이 무조건 창건 연대와 배경에 대한 조작을 거리낌 없이 일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인사는 굳이 창건이 오래되었다고 조작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주목해 볼만한 자격을 간직한 절이다.

 

 부인사에는 1011(고려 현종 2)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여 70여년만에 완성되는 이른바 초조대장경이 봉안되어 있던 절이다. 대장경 간행 사업은 한자문화권에서는 중국의 송나라에 이어 두 번째로 행해진 일이었다. 어떤 시기에 어떤 경로를 밟아 그것이 이곳 부인사로 옮겨졌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아쉽게도 13세기 몽골 병란을 거치면서 불타버리고 말았다. 지금 현재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은 바로 그 몽골 침공에 대항하기 위해서 다시 제작된 것이다. 이처럼 부인사는 고려의 전성기에 초조대장경판을 소장한 적이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역사를 간직한 뿌리가 있는 사찰로 대접받아 마땅하다.

 

 2011년은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대구에서 개최되는 해이다. 역산(逆算)하면 초조대장경 판각이 시작된 지 꼭 1000년째 된다. 대구시가 이곳저곳에서 스스로 학술의 도시, 교육의 도시라고 마냥 내세우고 있는데 그런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기나 한지 모르겠다. 그에 걸맞지 않는 행정을 자주 한다. 대구는 전통적으로 인쇄문화가 매우 발달한 도시였다. 한때 학문과 교육의 도시로 인정받은 것도 바로 그런 배경 때문이다. 이를 깊이 되새기면서 대구시는 과거의 위상 찾기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쏟아 봄이 어떨지.

주보돈(경북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