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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남문화연구원   |  등록일 16-03-10 15:56   |  조회 1,647회

제38호: 금오산 자락의 갈항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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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오산 남쪽 사면 중턱에 위치한 갈항사의 현재 모습은 현재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60년대에 어떤 사람이 개인적 절을 지으면서 이름만 승계하였을 뿐 원래의 그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찰이다. 이미 오래 전에 폐허가 된 사지(寺址) 위에다 아무렇게나 지었으므로 원형이 제대로 고려되었을 리 만무하다. 원래 모습은 전혀 상상이 안 되는 상태이다. 다만 현지에는 보물 245호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이 보호각 속에 관리되고 있고 그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는 외형이 손상을 크게 힙은 조그마한 불상이 자리하여 얼핏 원래의 갈항사가 매우 유서 깊은 절이었음을 느끼게 할 따름이다. 

 

 사실 갈항사의 역사를 깊이 간직한 또 다른 증거로는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동서(東西)로 나란히 서 있는 두 기의 3층석탑을 손꼽을 수 있다. 이 탑은 원래 갈항사의 사지에 위치하였는데 1920년대에 도괴를 빌미로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옮겨간 탓에 현장에는 그 흔적만이 남겨져 있을 따름이다. 이관 당시 두 탑의 기단부로부터 나온 사리장치 일체는 지금 국립대구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두 탑 가운데 국보 99호로 지정된 동탑의 기단부에는 이두문으로 작성된 54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 왔다. 천보(天寶) 14(758) 신라의 제 38대 원성대왕(명문은 경신대왕으로 표현되어 있다. 경신은 즉위하기 전 본래의 이름이며, 원성왕은 사후의 시호이다)3남매가 이 탑을 건립하였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758년이라면 아직 원성왕이 즉위하기 이전이므로 탑 자체는 바로 이 시점에 세워졌지만 명문은 원성왕이 재위할 당시에 새겨졌음이 확실하다. 말하자면 탑의 건립 시점과 명문의 작성 시점은 30년 정도 시차를 보이는 것이다. 이 절은 8세기 중엽에 이르러 왕위에 오를 정도의 최고 귀족 집안 원찰(願刹)에 어울리게 상당한 규모와 위용을 자랑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실 여기저기에 흩어져 나딩구는 전돌이나 계단의 석축 등은 저간의 실상을 웅변하고 있다.

 

 그러나 갈항사가 창건 당초부터 그처럼 큰 규모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그 절의 이름에서 언뜻 유추되듯이 원래 칡덩굴을 대충 엮어서 지은 보잘것없는 상태였다. 그러다가 몇십년이 흐른 뒤 원성왕의 집안이 사찰에 관계하게 되면서 급작스럽게 그 규모가 커진 것이다. 당시의 이야기는 삼국유사의 승전촉루(勝詮??)조에 전해진다.

 

 승전이란 승려는 신라가 삼국을 통합한 직후 무렵인 7세기 말 당나라에 유학하였다. 거기에서 화엄학의 3대조인 법장에게서 배우고 귀국하였다. 그가 돌아올 때 법장이 자신과 실력을 경쟁한 적이 있는 의상에게 묻는 질문이 담긴 편지를 갖고 와서 전달해 주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후 성전은 왕도 경주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저 먼 지방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당시로서는 금오산 자락은 외딴 변두리 지역이었다. 아마도 왕경 구세력의 견제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여겨진다. 당나라 유학으로 통하여 80권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화엄학을 배워왔건만 후학 양성의 길이 막혀버리자 승전은 족적이 별로 미치지 않는 금오산 자락 깊숙이 들어가 칡덩굴을 엮어 절을 짓고서 홀로 살았다. 승전화상은 깊어가는 시름을 달래기 위하여 돌로 사람의 얼굴 모습을 80여개 만들어 그들을 대상으로 화엄학을 가르쳤다. 이 돌들은 촉루라 불리었다. 이번에 그 가운데 일부만이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나머지는 앞으로 발굴하게 되면 전부 찾아낼 수 있을 터이다. 그를 통해 전성기 갈항사의 전모도 확연히 드러날 것으로 기대해 본다.

주보돈(경북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