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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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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남문화연구원   |  등록일 16-03-10 15:55   |  조회 1,772회

제37호: 금오산(金烏山) 기슭의 의리정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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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에서 고속도로로 약 30분 거리에 있는 구미 금오산은 경치가 아름답기도 하지만, 특히 길재(吉再)의 유적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길재는 원래 선산 해평현(海平縣) 사람인데, 금오산 북쪽 고아읍 봉한리(鳳漢里) 외가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주로 살았다.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는 개성으로 가서 태종 이방원과 한 동네에 살았고, 고려가 멸망하자 전 왕조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 다시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고향에 자리를 잡은 길재는 금오산을 왕래하며 가난하게 생활하였다. 중국의 백이?숙재(伯夷叔齊) 형제가 전 왕조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다 죽었던 그런 지조 있는 삶을 따르고자 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금오산 밑에 정자를 지어 채미정(採薇亭)이라 이름 하였고, 묘소 아래 재실(齋室)을 지어 백이숙제 사당에 걸린 백세청풍(百世淸風)이란 글을 따서 청풍재(淸風齋)라 하였으며, 비석 이름까지 백이?숙재의 비석과 동일하게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라 하였다. 황하강 중류의 지주산(砥柱山)이 수천 년 동안 강물에 휩쓸리지 않고 의연히 있는 그 모습처럼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는 의리정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길재의 영향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금오산 기슭에는 의리(義理)와 관련된 설화가 유난히 많다. 약가(藥哥) 의우(義牛) 의구(義狗) 향랑(香娘) 설화 등이 다 그런 것이다. 약가는 길재와 한 마을에 살았던 처녀인데, 평소에 길재의 가르침에 따라 늘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 한다. 나중에 조을생(趙乙生)이란 사람의 아내가 되었는데, 남편이 군대에 갔다가 왜구(倭寇)에게 잡혀가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부모의 개가(改嫁) 요구를 거부하며 끝까지 기다렸으며, 8년 만에 마침내 살아서 돌아온 남편을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의우(義牛)는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소 이야기이다. 조선 인조 때 이민환(李民?)이 선산 땅을 지나가는데, 길가에 의우총(義牛塚)이란 무덤과 비석이 있었다. 그래서 소가 무슨 의리가 있다고 무덤을 만들고 비석까지 세웠는가 하고 시골 노인에게 물어보았더니, 대답하기를 한 농부가 밭갈이를 하는데, 호랑이가 나타나 소를 물었다. 농부가 힘을 다해 막았더니, 호랑이가 그만 농부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소가 다시 큰 소리를 지르며 사력을 다해 싸웠다. 그래서 소는 호랑이와 함께 죽고, 농부는 살아났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의롭게 여겨서 무덤을 만들고 비를 세웠다.” 라고 하였다는 내용이다.

 

 의구(義狗) 역시 주인을 위해 죽은 개 이야기이다. 선산부사 안응창(安應昌)이 쓴 의구전(義狗傳)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개를 데리고 이웃 고을에 갔다가 술이 취해 돌아오는 길에 월파정(月波亭) 북쪽에서 낙마하여 졸도하였다. 그 때 마침 들불이 발생하여 주인에게로 타들어왔다. 다급해진 개가 수백 보 떨어진 낙동강으로 달려가 꼬리를 물에 적셔 불을 껐다. 그러다가 개는 지쳐서 죽고, 주인은 겨우 화재를 면할 수 있었다. 주인이 깨어나 이 사실을 알고는 무덤을 만들어 주었으며, 후세 사람들이 이를 의롭게 여겨 이곳을 개 무덤 마을(狗墳坊)이라 하며 감탄하였다는 이야기이다.

 

 향랑(香娘) 설화는 이광정(李光庭)임열부향랑전(林烈婦?娘傳)에 자세하다. 그는 17세 때 3살 연하의 임칠봉(林七逢)에게 시집을 갔는데, 철이 없고 거만하며 함부로 매질을 하였다. 그래서 시부모가 친정으로 돌려보냈더니, 친정 계모가 욕을 하며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외가로 갔더니 외숙부가 또 재혼을 시키려고 협박하였다. 아무 데도 갈 곳이 없게 된 향랑은 길재의 무덤과 사당이 있는 금오산 남쪽 낙동강 언덕으로 가서 저고리를 벗어 머리에 뒤집어쓰고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금오산 기슭에는 길재 유적을 비롯하여 그의 의리정신과 상통하는 설화가 많이 있다. 그리고 이런 유적과 설화는 조선시대 내내 흥미로운 글쓰기 대상이었다. 기대승(奇大升) 윤근수(尹根壽) 김창흡(金昌翕) 이덕무(李德懋) 홍직필(洪直弼) 등 많은 지식인들이 산문 혹은 장편 단편의 시와 노래를 지었으며, 설화 내용을 여러 장의 그림으로 그려 전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의리 있게 살기가 어려웠던 사정을 반영한 역설일 텐데, 이런 옛 이야기가 지금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또 무엇 까닭일까?

 

황위주(경북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