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itute of Youngnam Culture Research

top

영남문화산책

홈 > 열린마당 > 영남문화산책

작성자 영남문화연구원   |  등록일 16-03-10 15:53   |  조회 1,552회

제34호: 성호 이익의 영남 이야기

본문

​​

 성호 이익은 혁신적인 사고로 시대의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한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 성호사설에는 영남속(嶺南俗)이라는 한 편의 글이 있다. 많이 알려진 글이지만 영남의 세태를 두고 고금을 음미하게 하는 맛이 있다.

 

 “영남은 서울과 멀리 떨어져서 풍속이 완연히 다르다. 누에를 치고 길쌈하며 무명을 생산하여 부녀자가 밤에 잠을 덜 자고서 사철 옷을 장만한다. 장례와 혼인에 필요한 물자가 집안에서 마련되지 않음이 없으며, 또 서로 구휼하는 일에 독실하여 가세가 빈곤한 자는 친척과 벗이 함께 도와서 파산을 면하게 한다. …… 내가 영남의 선비들을 보면 모두 삼으로 삼은 신을 신었기에 물어 보았다. 말하기를 집에 있으면 짚신을 신을 뿐, 삼으로 삼은 신조차 신지 않는다.’고 한다. 그 검소함이 이와 같다.”

 

 성호가 본 영남은 검소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이 서로 도우며 사는 곳이었다. “선비가 농사에 힘쓰지 않고, 부녀자가 길쌈하기를 부끄럽게 여기고 복식을 화려하게 꾸미며, 혼인과 장례에 막대한 비용을 들이지 않으면 치욕으로 여기던나라에서 영남은 별천지였던 것이다.

 

 “벼슬의 높고 낮음을 가지고 인망의 경중으로 삼아서 여러 대 동안 관직이 없는 자는 비록 깊고 뛰어난 재질과 행실이 있다 하더라도 천역으로 몰아넣고, 문벌 있는 집에서는 함께 서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 …… 영남에는 벼슬 이외에 따로 세족(世族)이라는 것이 있으니, 학문이 해박하고 처신에 흠결이 없다면 비록 10대에 걸쳐 벼슬이 없다 하더라도 고을의 인망이 자연히 높아 무궁토록 이를 전해 내려 갈 수 있다.”

 

 영남은 학문과 도덕적 실천을 중시한다는 말이다. 온 나라가 벼슬의 높낮이로 개인을 가늠하던 시절에 영남에는 학문과 실천이라는 별도의 잣대가 있었던 것이다. 영남은 그런 곳이었다. 학문을 쌓고 의리와 원칙을 지키며 관직과 재물을 탐내지 않는 고결한 인품을 지닌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이런 사람들을 선비라고 하니 조선이 선비되기를 장려하였으되, 경향의 사족들이 벼슬길에 골몰하고 있을 때 영남에만 유독 선비의 기풍이 살아 있음을 성호가 눈여겨 본 것이다. 조선 중기에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문하를 드나들며 학문을 익힌 정구(鄭逑)라는 학자가 있었다. 그의 싯구에 대장부의 마음은 흰 해와 푸른 하늘과 같다(大丈夫心事, 白日與靑天)”는 구절이 있다. 대장부의 마음자리는 청천백일처럼 맑고 밝아 누구에게 보이더라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자부를 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영남의 선비들이었다.

 

 성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 글을 끝맺는다. “그러므로 나는 빈천한 선비가 살 곳을 택한다면 영남만한 데가 없다고 할 것이다.” 성호는 이처럼 영남의 선비들과 어울려 같이 살고 싶었던 것이다.

 

 성호의 영남에 대한 이런 인식이 결과론적 분석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남인의 몰락 이후 벼슬길이 끊긴 영남의 사족들이 만들어낸 자구책이 학문과 실천에의 집착으로 나타났다는 논리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근면하고 검소하지 않으면 살길이 막막해서 그리하였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한 시절 이 땅에 그렇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음미해 볼 일이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 갈고 닦은 나의 유능함으로 나보다 덜 유능한 사람보다 풍족한 삶을 살아야 행복한 줄 아는 시대가 되었다. 영남도 바뀌었다. 경기도 안산에 살던 성호는 이곳에 와서 살고 싶어 하였지만 지금 이곳 사람들은 기회만 되면 서울로 가고자 한다. 성호가 만났던 검소하고 올곧은 그 영남 선비들이 그리운 즈음이다.

이세동(경북대 중어중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