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itute of Youngnam Culture 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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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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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남문화연구원   |  등록일 16-03-10 15:49   |  조회 2,009회

제30호: 낙동강 풍류, 그 선유시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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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장으로만 살 수가 없듯이 이완만으로도 살 수가 없다. 긴장은 스스로를 반듯하게 하나 경직되기 쉽고, 이완은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나 방탕으로 흐르기 쉽다. 이 둘의 양단을 제대로 잡아 중용의 길을 걷는 것이야 말로 보다 높은 자아를 성취하는 데 있어 참으로 중요하다. 고인들은 질서를 위하여 도학(道學)을 탐구하였고, 자유를 위하여 문학(文學)을 창작하였다. 경전을 연구하거나 시를 읊조리는 것으로 이것은 구체화되었다. 두 가지의 일치를 요구하는 도문일치(道文一致)도 알고 보면 이 같은 고민 속에서 제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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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시대의 선비들은 만나고 헤어질 때면 으레 시를 지어 마음을 전하였고, 누가 회갑을 맞거나 죽음을 맞이하는 등 특별한 일이 있을 때도 시로써 자신의 뜻을 표현하였다. 좋은 시는 씹으면 씹을수록 새로운 맛이 난다. 함축된 뜻이 깊게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시를 짓기 위하여 선비들은 시회를 결성하여 스스로 시를 짓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시를 감상하거나 비평하기도 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시대의 시인들에게도 이어지고 있으니 그 유래가 오래된 것이라 하겠다.

 

 영남의 강 낙동강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문학창작 공간이었다. 특히 배를 강물에 띄우고 시회를 여는 선유시회(船遊詩會)는 오랫동안 진행되면서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왔다. 문헌에 입각해 보면 이규보의 시대에서 시작하여 19세기 후반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선유시회는 7백 여년이나 지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171년간의 공동시집인 낙강범월시(洛江泛月詩)135년 간의 공동시집인 홍판관운(洪判官韻)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낙강범월시를 중심으로 보자. 이 시집은 낙동강의 본류가 시작되는 상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상산선유시회(商山船遊詩會)의 작품집이다. 상주의 제1경으로 알려진 경천대(擎天臺)에서 배를 띄워 동남쪽의 도남서원(道南書院)을 거쳐 영남의 3대루 가운데 하나인 관수루(觀水樓)에 이르는 30여리의 구간에서 시회가 개최되었고, 1607년부터 1778년까지 총 8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대를 어어가며 선유시회를 연 것은 일찍이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낙동강의 선유시회 가운데 1622(임술)에 이루어진 시회는 낙동강 시회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이 시회에는 창석(蒼石) 이준(李峻) 24명이 참여하였고, 소동파 적벽부의 머리글자 23자를 운()으로 하여 시를 지었다. 창석은 시집의 서문에서 우리들이 비록 부()를 짓는 재주가 없으나, 좋은 경치를 만나 흥취를 이루는데 있어서는 옛사람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다라고 하면서 낙동강 시회의 흥을 돋우었다.

 

 이 시회에서 어떤 이는 낙동강 안개 속에 거룻배를 모는데, 어진 선비들이 함께 시회를 가졌네. 십리에 흐르는 달빛 강물을 거슬러 오르고, 노 젖는 소리에 물가의 새가 놀란다네(이희성)’라고 하였고, 어떤 이는 소동파가 적벽강에 배를 띄웠으니, 훌륭한 일을 누가 다시 이었던가? 우리들은 세속 밖의 사람들로 풍류로는 모두 제일이라네(조정)’라고 하였다. 또 어떤 이는 취흥이 참으로 도도하니, 세상 일은 혀를 찰만하다네. 남은 날은 술잔에 부쳐, 명예의 길 벼슬길은 사양하리라(김혜)’라고 노래하였다.

 

 시가 지닌 마력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미와 생명이 있는 곳에 시가 있다고 누가 말 했던가? 오늘날 우리는 서정이 몰락한 시대에 살고 있다. 빛나는 논리가 시력을 잃게 하고, 사람이 살지 않는 도회에는 아우성만 난무하다. 사태가 이러할 진대 가끔 어둠을 지고 낙동강으로 나가 볼 일이다. 거기서 충일한 생명력을 건져 올리며 신성한 본능과 비범한 영감을 맛볼 일이다.

정우락(경북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