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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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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남문화연구원   |  등록일 16-03-10 15:47   |  조회 1,675회

제28호: 역사로 보는 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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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1일자로 마침내 경북대학과 상주대학이 하나로 통합되었다. 통합은 순조롭지가 못하였으며 그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진통의 과정을 겪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정부에서는 수년 전부터 전국적으로 난립 상태라 하여도 좋을 국립대학을 정리하여 1시도(市道) 마다 하나만 존치시킨다는 목표 아래 약간의 당근을 내걸고 국립대학간 통합을 유도해 왔다. 그런 정책에 적극 부응하여 우리 대학도 줄곧 통합을 시도하였다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이제야 성사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통합의 열기는 쉬 고조되지 못하고 오히려 문제점이 표출되거나 아니면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가라앉은 듯한 느낌이다. 그것은 여하튼 상주에 우리 경북대학의 캠퍼스가 두어진 셈이 되었으니 이 참에 그 쪽의 상황에 대해서도 약간이나마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도리일 듯싶다.

 상주는 역사적 지리적으로 보아 낙동강 유역에 위치한 여러 도시 가운데 가장 중심적이라 할 만하다. 북쪽과 서쪽으로는 소백산맥 바깥으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하며 안으로는 낙동강과 연결되는 교통상의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선진문물이 유입되기가 쉬웠다. 영남지역 가운데에서 청동기문화가 가장 발달한 곳으로 손꼽히는 것도 그런 배경 때문이다. 그를 기반으로 삼아 초기국가가 이른 시기에 성립하였으니 그 이름을 사벌국(沙伐國)이라 하였다. 상주가 역사무대에 처음으로 구체적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사벌국은 기록상으로는 3세기 중엽의 첨해왕(沾解王)대에 신라에 복속된 것으로 나타나지만 여러 측면에서 보아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대체로 4세기 어느 시점에는 신라 영역으로 편입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럼에도 그곳에 아직은 중앙으로부터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아 기존의 독자성이 반쯤은 유지되던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525년에 이르러 법흥왕이 이 방면의 정치적 군사적 중요성을 인지하여 중앙군을 거느린 지방관인 군주(軍主)를 주둔케 하면서 크게 부각되었다. 진흥왕은 한강유역으로 진출한 직후인 552년 이 지역을 왕경에 대응하여 지방 가운데 가장 위쪽이라는 뜻을 가진 상주(上州)로 고치고 대규모의 군단을 상주(常駐)시켰다. 아마도 지방 전체의 정치적 군사적 중심지로 삼으면서 동시에 북쪽에서 왕경인 경주로 들어가는 길목을 관장하도록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757년에 이르러서는 현재 통용되는 상주(尙州)라는 이름으로 고쳤다. 당시 신라는 전국을 9()로 나누어 통치하였는데 그 중 하나인 상주는 예천, 안동, 의성, 구미, 김천, 영동, 옥천, 보은 등 10개의 군()을 관장하였다. 특이한 점은 오늘날과는 달리 충청북도의 일부 지역이 상주의 관할 아래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려시대의 성종 14(995)에 도제(道制)가 실시되면서 영남도(嶺南道)가 두어졌을 때 장관인 절도사가 상주에 파견되었다. 그 한참 뒤인 충숙왕 원년(1314)에는 경주의 경()과 상주의 상()을 각기 따서 경상도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로 보면 고려시대에도 상주는 여전히 경주에 버금갈 정도로 정치적 군사적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초에 상주목(尙州牧)이 설치된 이후 상주목사가 경상감사를 겸임하였으니 그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임진왜란 이후인 1601년에 이르러 대구로 옮겨질 때까지 상주는 줄곧 경상감영으로 기능하였다. 이로 보면 상주만큼 오래도록 영남의 정치 문화적 중심지로 기능한 곳은 달리 없다고 하여도 좋을 듯하다. 이는 상주가 영남의 안팎을 연결하는 중심 통로일 뿐 아니라 낙동강을 끼고 있는 수로교통의 요지였던 데서 말미암은 것이라 하겠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고려하여 장차 상주를 여하히 활용하느냐에 우리 대학의 명운이 달려 있다고 하면 좀 섣부른 진단일까.

주보돈(경북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