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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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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남문화연구원   |  등록일 16-03-10 15:45   |  조회 1,864회

제27호: 문경새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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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새재는 경북 문경시와 충북 연풍군의 경계 지역에 자리한 영남의 관문이다. 서울에서 남한강을 따라 배를 타고 내려올 때 경상도와의 접근 거리가 가장 가까운 곳이고, 경상도관찰사가 부임할 때 가장 빠른 길이 또한 이 길이었다. 그래서 문경새재는 험한 산세에도 불구하고 서울을 출입하는 중요한 교통로로 개척되었으며, 연중 사시사철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여 영남대로(嶺南大路)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문경새재에는 세 가지 주요한 고적이 있다. 조령원(鳥嶺院) 교귀정(交龜亭) 관문(關門) 등이 그것이다. 조령원은 오늘날로 보면 여관의 일종이다. 새재의 산세가 험준한데다가 도적과 호랑이의 출몰이 빈번하여 날이 저물면 넘어 다니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숙식을 해결할 수 있도록 여행자의 편의를 위해 설치한 것이다.

 

 교귀정(交龜亭)은 신임 관찰사와 퇴임 관찰사가 공식적으로 처음 만나 임무교대를 하는 장소였다. 교귀(交龜)의 귀()는 거북 모양의 도장 밑바닥에 관찰사의 직함을 새긴 직인(職印)이고, 교귀(交龜)란 바로 이 직인을 후임자에게 넘겨주는 행위를 말하며, 이런 의식을 거행하는 장소가 바로 교귀정(交龜亭)이었다. 관찰사의 임기가 대략 1년이었으니, 1년에 한 번씩은 이런 의식이 거행되었던 셈인데, 그때마다 신임 감사를 맞이하고 퇴임 감사를 전송하는 사람들로 좁은 새재 골짜기가 한 동안 떠들썩하였다.

 

 관문(關門)은 문경새재 최남단의 제일관(第一關)인 주흘관(主屹關)부터 제2(第二關)인 조곡관(鳥谷關)과 새재 고개 마루의 제3관인 조령관(鳥嶺關) 등 세 관문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유끼나가(小西行長)의 군대를 방어하기 위해 내려왔던 신립(申砬) 장군이 험준한 새재 골짜기를 버리고 그 넘어 충주 달천(達川) 가에 배수진을 치고 대항하다가 패전한 뒤, 새재에 산성(山城)을 축조하면서 이 관문을 설치하였다.

 

 문경새재를 넘나든 사람은 그 부류가 참으로 많고 다양하였다. 관찰사의 부임 행로가 이곳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경상도 70여개 군현의 군수와 현감, 특명을 받고 파견되는 암행어사나 각종 특사, 일본을 왕래하는 사신(使臣)과 그 수행원 등이 대부분 이 길을 통과하였다. 서울에 과거시험을 보러 가는 사람, 서울에서 벼슬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사람, 왕실에 올릴 각종 특산물과 선물을 운송하는 사람, 유배객이나 죄수를 호송하는 사람, 기타 각종 여행객과 보부상 짐꾼 등 별 사람이 다 있었다.

 

 이처럼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넘나들었던 만큼 문경새재는 영남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시문학 창작 공간의 역할을 하였다. 서거정(徐居正)은 서울에서 어버이를 뵈러 대구로 내려오는 길에 조령을 넘으며(踰鳥嶺)’라는 시를 지었고, 김시습(金時習)도 이곳을 지나면서 조령을 넘어 시골집에 자며(踰鳥嶺宿村家)’ 라는 시를 지었다. 위항시인으로 유명한 홍세태(洪世泰)는 새재 골짜기에 들어서면서부터 고개를 다 넘을 때까지 입협(入峽) 조령(鳥嶺) 용추(龍湫) 조령가(鳥嶺歌) 초곡(草谷) 후조령가(後鳥嶺歌) 등 여러 편의 시를 지었고, 정약용(丁若鏞)도 외삼촌을 만나러 왔다가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문경새재는 이처럼 글을 아는 지식인들의 창작 공간만이 아니었다. 험한 고개에 호랑이의 출몰이 빈번하여 호환(虎患)과 관련된 전설과 민담이 많고, 닭장수를 혼내준 달성판관(達城判官) 이야기, 문경새재 성황신(城隍神) 이야기, 신립장군에 얽힌 이야기 등 다양한 설화문학이 생성된 곳이었으며, 문경새재아리랑의 산실이기도 하였다. 이곳을 넘나든 온갖 사람들의 사연과 애환이 함께 어우러진 문학 창작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황위주(경북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