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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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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남문화연구원   |  등록일 16-03-10 15:42   |  조회 1,817회

제25호: 강안학, 하나의 영남학을 위하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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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 이후의 영남유학은 주로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나누어 이해해 왔다. 서울에서 보아 왼쪽을 영남좌도(嶺南左道)라 하고 오른쪽을 영남우도(嶺南右道)라 하였던 것이다. 좌도는 안동이 중심이 되며 주로 퇴계학파가 활동하였고, 우도는 진주가 중심이 되며 주로 남명학파가 활동하였다. 이 양 학파는 서로 다른 지역적 특징이나 인문지리적 환경에 따라 문화를 형성해 왔으며, 인조반정 이후에는 퇴계학파로 단일화되는 듯하지만 이면적으로 경쟁하고 갈등하는 관계를 지속하였다.

 영남을 둘로 나누어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땅 중심의 이해방식이다. 이 때문에 가능한대로 강의 안쪽에 위치한 지역이나 특정한 인물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에 초점을 둔다. 안동의 퇴계와 퇴계학파, 진주의 남명과 남명학파는 이렇게 부각될 수 있었다. 이 같이 이분법적 사고에 입각하여 영남유학을 읽는 것은 조선후기에서부터 현재까지 이르고 있으니 그 연원이 자못 깊은 것이라 하겠다. 성호 이익이 좌도는 인()을 숭상하였고, 우도는 의()를 앞세웠다고 한 것도 이 같은 시각에서 제출된 발언이다.

 분리의 땅을 너머 통합의 강으로 영남을 이해할 수 있다. 이를 위한 용어가 바로 강안학(江岸學)이다. 강안학은 ()’()’, 그리고 ()’을 조합한 것이다. ‘은 물론 낙동강을, ‘은 그 연안을, ‘은 학문을 의미한다. 강안의 의미를 확장시키면 우리나라에 있는 수많은 강의 연안이 될 수 있고, 학문도 유학뿐만 아니라 불교나 도교까지도 포함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 용어는 퇴계와 남명이래의 영남학을 강좌와 강우로 나누어서 이해하는 방식을 지양하면서 그 중간 점이지대를 새롭게 설정한 것이니 강안은 낙동강 연안이며, 학문은 유학이다. 이 또한 그 연원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이다.

 강원도 태백시 화전동에서 정선군 고한읍으로 넘어가는 곳에 싸리재가 있다. 싸리재를 중심으로 저쪽 너머에는 한강의 발원지가 있고, 이쪽 너머에는 낙동강의 발원지 너덜샘이 있다. 이렇게 시작된 물줄기는 남하하다가 안동부근에 이르러 반변천 등을 만나면서 방향을 서쪽으로 바꾸고, 점촌 부근에서 내성천을 합하며 다시 남쪽으로 흐른다. 이 강이 마산?진해의 산지에 막혀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마침내 부산의 서쪽에 이르러 바다로 흘러든다. 대체로 영남의 열읍(列邑)자로 흐르며 지나간다.

 퇴계학파는 낙동강의 상류 좌측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남명학파는 낙동강의 하류 우측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퇴계학파는 남진을, 남명학파는 북진을 모색하게 되었고, 중간 점이지대인 낙동강 중류의 연안지역에 거점을 마련하였던 한강 정구를 중심으로 한 한강학파는 절충과 통합을 강조하며 강의 좌우를 통섭하고자 했다. 이 학파는 강을 사이에 두고 대립한 영남의 좌우를 하나로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선악이나 군자·소인 등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지닌 심각한 문제를 인식한 것이다.

 낙동강은 하나의 영남을 만든다. 대립과 분열이 아니라 화합과 평화의 영남을 이룩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생각에 입각하여 이 지역의 많은 학자들은 소통과 상생을 강조하며 통합논리를 만들었다. 여헌 장현광의 경위설(經緯說)도 그 가운데 하나다. 씨줄과 날줄이 상보적 관계를 유지해야 온전한 베가 되듯이 우주 만물은 배타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으며, 새로운 원리는 바로 이 같은 유기적 관계 속에서 창출된다는 것이다. 분열로 점철된 우리 시대를 치유할 수 있는 논리체계인듯하여 반갑다.

정우락(경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