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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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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남문화연구원   |  등록일 16-03-10 15:41   |  조회 1,944회

제24호: 대구의 읍성 이야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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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어느 시민사회단체의 주도로 대구시민 한 사람씩 대구 읍성(邑城)의 성돌을 쌓는 운동을 벌인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이를 접하면서 과연 대구시민들이 얼마나 읍성에 대해서 알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필자는 몇 차례 대구의 역사에 관한 강의를 할 때 청중들에게 읍성에 대해 물었더니 의외로 그 향방에 대해 아는 사람이 적어 놀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낙동강 주변을 다루기에 앞서 대구읍성에 대한 이야기부터 먼저 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대구에 읍성이 쌓여진 것은 영조 12(1736)의 일이다. 같은 자리에 흙으로 만든 토성이 그 전부터 있었지만 이것은 방어보다는 단지 행정의 중심지라는 의미밖에 갖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 때에 이르러 견고한 석성을 쌓아 지방민에 대한 통제도 강화하는 한편 외침에도 대비하고자 한 것이었다. 원래 수령이 파견되는 군현(郡縣)의 중심지를 읍치(邑治)라 하고 거기에 성을 쌓아 읍성이라 불렀다. 대구는 1601년 경상감영(慶尙監營)이 두어진 곳이므로 자연 읍성의 안에 감영의 관아가 위치하게 되었다. 현재의 중앙공원(감영공원)이 바로 그곳이다. 사실 지방관이 읍성 안에 자리하게 되자 양반사족들은 가능하면 읍성의 바깥으로 나가고, 그로부터 멀리 떨어진 산야에 거주하기 마련이었다. 가까이에서 자주 접하는 것은 서로에게 거북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당파가 다른 지방관이 파견되어 올 때는 더욱 더 그러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읍성 안의 제반 사항을 주도한 것은 중인층이 될 수밖에 없었다. ​​

 그런데 대구 읍성은 1906년에 이르러 헐리고 말았다. 읍성 철거에 앞장선 사람은 당시 대구군수로서 경북관찰사서리직을 겸하던 박중양이란 인물이었다. 그가 대구군수로 부임할 수 있게 된 것은 침략의 원흉인 이토오 히로부미의 추천이었으므로 이후 어떤 행로를 보이게 될지는 저절로 드러난다. 그는 대구군수로 부임하기 이전 7년 동안 일본에 유학한 경험이 있고 이때에 이미 일본식 이름인 야마모토(山本)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전형적인 친일세력의 길을 걷게 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였다. 읍성을 헐게 된 것 자체는 바로 그 출발이었다. 말하자면 대구 읍성의 철거는 곧 일제 침략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지나가면서 읍성의 북쪽에 자리한 곳에 대구역사(驛舍)가 들어서자 기존 상권에 변동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경제 활동의 중심인 읍성 안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조선상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1893년 무렵부터 대구에 들어온 일본상인들은 자연 읍성 바깥에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다. 성벽은 그들이 상권을 급속히 확장해 가는데 큰 걸림돌이었다. 그런데 경부선 철길이 바로 성벽의 바로 바깥을 지나게 되면서 기존 상권이 변화할 계기가 주어지자 고의적으로 성벽을 무너뜨리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박중양의 대구군수 부임은 성벽 철거를 관철시킬 절호의 기회였다. 중앙정부가 성벽철거를 불허한다는 방침을 세웠지만 군수는 그대로 강행하여 일본 상인들의 편에 섰다. 이후 대구의 상권을 전부 일본인들이 장악하였음을 물론이다. 반월당이라는 명칭이 그를 뚜렷이 상징한다.

 무너진 성벽은 주변의 낮은 지대를 메우는데 사용되었다. 읍성의 서쪽에 위치한 사창가가 자갈마당으로 불리게 된 연유도 거기에 있다. 성벽은 저절로 도로로 바뀌어지고 그 양쪽 길가에는 상가가 들어섰다. 대구의 중심가를 감싸 안은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가 바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남문시장, 서문시장 등도 남문, 서문의 자취이다. 그 중 남문만은 복원되어(실제와는 다르므로 그렇게 이름 하기도 어렵지만) 저 멀리 금호강변에 무심히 서 있다.

​​주보돈(경북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