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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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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남문화연구원   |  등록일 16-03-10 15:40   |  조회 1,856회

제23호: 삼강마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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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산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예안 안동을 거쳐 예천군 풍양면과 문경군 영순면의 경계 지점에 이르면 두개의 큰 하천과 합류한다. 소백산에서 발원하여 영주 예천을 지나 용궁 회룡포(回龍浦)를 감돌아 흘러내린 내성천(乃成川), 사불산(四佛山)과 운달산(雲達山)에서 발원하여 문경군 산북면과 산양면을 거쳐 흘러 내려온 금천(錦川)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이 세 개의 큰 강이 합류하는 지역을 삼강(三江)이라고 하였는데, 낙동강이 충분한 수량을 확보하여 낙동강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이 바로 이곳부터였다.

 

 삼강마을은 세 개의 강이 합류되는 지점일 뿐만 아니라 안동에서 흘러온 학가산맥(鶴駕山脈)과 대구에서 흘러온 팔공산맥(八公山脈) 문경에서 흘러온 주흘산맥(主屹山脈) 등 세 개의 큰 산맥 끝자락이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어우러져 참으로 경치가 수려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세 개의 강이 합쳐져서 강물의 수량이 많고 수심이 깊었던 만큼 소 10마리를 한꺼번에 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배가 다녔고, 남해안에서 올라온 소금배가 안동 예천지역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 동안 정박하는 장소이기도 했으며, 경상도 동남 내륙지역에서 한양 서울을 출입하는 사람들이 건너다니는 주요 길목이기도 하였다.

 이 마을은 임진왜란 직후 약포(藥圃) 정탁(鄭琢)의 셋째 아들 청풍자(淸風子) 정윤목(鄭允穆)이 터전을 잡아 살던 곳이다. 정윤목은 나이 19세 때 중국 사신으로 가는 아버지 정탁을 따라 중국에 들어갔다. 그 때 백이숙제(伯夷叔齊)의 사당을 지나다가 그곳에 걸린 백세청풍(百世淸風)이란 글자에 감동되어 그 글자를 실물 크기로 베껴 왔다. ‘영원히 맑은 바람’. 세상의 부귀영화에 굴하지 않고 목숨을 바쳐 인간의 도리와 지조를 지킨 백의 숙제 형제의 올곧은 삶을 상징한 말이다. 그는 이 글을 좋아하여 자신의 호를 청풍자(淸風子)라 하였고, 삼강 마을에 건축한 강당 이름을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 하였으며, 혼탁한 정치현실을 등지고 이곳에서 강산을 벗 삼아 학문과 강학으로 일관하였다.

 이후 삼강마을은 청풍자 정윤목의 후손들이 조상의 덕을 기리면서 대를 이어 살아가는 터전이 되었다. 강을 훤하게 내려다볼 수 있는 남쪽 언덕에 백세청풍(百世淸風)의 강당이 있고, 지금은 빈터만 남았지만 영남지역의 대표적 학자였던 정몽주(鄭夢周) 이황(李滉) 류성룡(柳成龍) 세 분을 배향한 삼강서원(三江書院)이 있었으며, 강 건너편 월봉산(月峯山) 아래 세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는 삼호정(三湖亭)이 있었다. 특히 마을 아래 옛 나루터 곁에 자리한 주막집은 낙동강 연안에서 유일하게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곳으로, 그 옆에 서 있는 회화나무 고목과 함께 세월의 장구함을 상징한다.

 삼강마을은 이처럼 경치가 수려할 뿐만 아니라 뱃길을 이용한 인물의 왕래가 잦은 교통의 요지였고, 청주정씨 후손들의 고적이 산재해 있는 곳이다. 그래서 그 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경치가 아름다운 여덟 곳을 골라 삼강팔경(三江八景) 시를 지었고, 마을 앞을 지나는 낙동강 구비마다 뛰어난 절경(絶景)을 두고 삼강구곡(三江九曲) 시를 짓기도 하였다. 이곳을 왕래하는 선비들은 경치 좋은 명승과 고적을 시로 읊었고, 주막에 머물던 길손과 뱃사공 보부상 등은 강 마을에 전해오는 옛 이야기와 경험담을 서로 주고받으며 흥미로운 설화를 만들어내었다. 온갖 문학 창작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삼강마을은 경상북도 문화마을로 지정되었고, 강변에 남아 있는 옛 주막으로 널리 알려진 명소가 되었다. 그러나 실재 이 마을은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강마을 고적을 대상으로 한 문학 창작의 공간으로 더욱 중요한 가치가 있다.

황위주(경북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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