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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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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남문화연구원   |  등록일 16-03-10 15:39   |  조회 2,136회

제22호: 세종대왕과 경상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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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사극 대왕 세종이 인기다. 나도 이 사극은 꼭 본다. 훈민정음과 세종대왕을 여러 모로 공부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종대왕과 경상도라는 제목은 좀 엉뚱한가? 두 낱말의 연결이 좀 어색한가? 아니다. 세종이 다스린 조선에 경상도가 들어가 있었으니 어찌 서로 인연이 없었겠는가! 세종실록에 등장하는 경상도 관련 기사는 모두 제외하고, 우리 고장과 얽혀 있는 세종대왕 이야기를 한 번 들여다 보자.

 세종대왕과 경상도의 인연이라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원본 훈민정음(해례본)이 이 고장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원본 훈민정음은 경상북도 안동군 와룡면 주하리에 살던 이한걸(李漢杰)의 집에 전해지던 것을 그의 아들 이용준이 스승 김태준에게 보여 주었고, 김태준은 간송 전형필에게 이 책을 넘겼다. 이 책이 널리 알려진 때는 19407월이었다. 지금은 국보로 지정되어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훈민정음 반포(1446) 직후에 간행되었을 이 책은 오로지 한 권밖에 전하지 않는 유일본이다. 이 책은 말 그대로 세계적 보물이다. 이 귀중한 책이 오직 경상도에서만 나타났음은 영남이 예로부터 학문의 고장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원본 훈민정음1940년에 발견된 후 그 내용을 단행본으로 처음 간행한 곳도 대구의 창란각이라는 출판사이다. 조선어학회에서 194610월에 양지(洋紙)훈민정음의 영인본을 간행했다. 이보다 먼저 대구의 창란각에서는 19464월에 원본을 모사(模寫)한 훈민정음 단행본을 한지(韓紙)에 인쇄하여 간행했다. 이 사실은 아직 학계에 알려져 있지 않다. 훈민정음은 원본이 안동에서 처음 나왔고 그것을 단행본에 담아 간행한 것이 대구에서 가장 먼저 이루어졌으니 이 또한 세종대왕과 우리 고장이 맺은 큰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세종대왕과 인연을 가진 중요한 문화유산의 하나는 성주군 월항면에 있는 세종대왕 왕자 태실이다. 세종은 슬하에 184녀를 두었다. 첫째 아들이 문종이고, 둘째가 세조이다. 세종대왕 왕자 태실에는 모두 19기의 태실석이 안치되어 있다. 왕자가 18명인데 태실은 왜 19기인가? 세종의 손자인 단종의 태실이 함께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태실석은 두 줄로 배열되어 있는데 앞 열에 11기 뒷 열에 8기이다. 뒷 열 왼편 구석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단종의 태실석이 서 있다. 성주 월항면의 이 태실은 조선시대 태실로는 가장 큰 규모이다.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태실을 모신 것은 이곳이 매우 뛰어난 명당이기 때문이다. 서진산에서 흘러내려온 산줄기가 여러 갈래로 나누이면서 그 아래에 한 번 돌출한 언덕에 태실이 있다. 그 자리에 서서 둘러보면 여근(女根)과 그 돌출부 형상이 여실하게 느껴진다. 왕실의 다산과 번성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이 자리가 선택된 것이다. 성주군에서는 참외축제를 할 때 왕자 태실 봉안식 행사를 벌여 태실의 존재와 의미를 새롭게 하고 있다.

 세종대왕과 관련된 흥미로운 설화가 의성군에 있다. 의성군 점곡면 명고리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길가에 높이가 10미터나 되는 검푸른 빛의 암석벽이 깎아 세운듯 서 있다. 이 바위에는 한자로 연경묘향탄암 계하성산옥곡암봉표’(涎慶墓香炭岩 棨下城山玉谷巖封標)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 바위는 세종의 사랑을 받았던 한 처녀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세종 때 이 바위가 있는 옥곡 마을에 취란이라는 재색겸비의 아리따운 처녀가 있었다. 취란 처녀의 이름이 멀리 서울에 들리어 드디어 궁녀로 발탁되었고, 그 어여쁜 용모가 세종대왕의 눈에 띄어 대왕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1여년 후 드디어 취란은 왕자 연경(延慶)을 낳았으나 취란은 궁중 비빈의 시샘과 시기를 받게 되었다. 드디어 모함을 받아 왕자를 데리고 고향 옥곡으로 낙향하는 신세가 되었다. 왕의 부름을 고대하였으나 소식은 아득하였다. 그러다가 왕자 연경이 급병으로 요절하였다. 왕자의 사망 소식을 들은 세종은 신하 이정재(李政在)를 보내어 장례를 지내고, 왕자 연경의 묘 지키는 일을 옥곡 마을에 맡겼다. 이 사실을 적어 향탄암(香炭巖)에 새긴 것이 바로 연경묘 봉표(封標)이다.

 설화로 전하는 이 이야기의 사실성 여부는 말하기 어렵다. 이정재라는 신하 이름도 실록에서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설화는 세종대왕의 사랑과 덕망을 그리워하는 백성들의 마음이 의성의 외진 시골 마을에까지 이르렀음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백두현(경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