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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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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남문화연구원   |  등록일 16-03-10 15:38   |  조회 1,556회

제21호: 가위론으로 낙동강 읽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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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위·바위·보에 닫히다열리다를 결합시켜보면 아주 특별해진다. 바위는 닫혀 있으며 보는 열려있고, 가위는 닫혀있으면서 동시에 열려 있기 때문이다. 바위는 닫혀 있으니 답답하지만 의지가 굳어 보이고, 보는 열려 있으니 시원하지만 가벼워 보인다. 그리고 가위는 바위와 보의 중간쯤에서 중용을 잘 잡고 있는 듯하지만 자신의 본래 모습이 무엇인지를 의심하게 한다.

바위적 세계관에 주로 작용되는 힘은 구심력(求心力)이다. 이 때문에 이 세계를 어떤 구심적 질서를 갖고 통일적 시각에 의거하여 파악하고자 한다. 이 세계관에서는 전통과 과거를 중시한다. 즉 구심력에 입각하여 과거로 거슬러 오르고자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전통이 있고, 선조가 있고, 핏줄이 있으며, 뿌리가 있고, 또한 집단이 있다.

 보의 세계관에 주로 작용되는 힘은 원심력(遠心力)이다. 이 때문에 이 세계를 어떤 원심적 자유논리에 입각하여 파악하고자 한다. 이 세계관에서는 창조와 미래를 중시한다. 즉 원심력에 입각하여 미래로 나아가고자 한다. 거기에는 창조가 있고, 세계가 있고, 이웃이 있으며, 가지와 잎이 있고, 또한 개체가 있다.

 가위적 세계관은 어떠한가? 이 세계관에는 구심력과 원심력이 동시에 작용한다. 이 때문에 구심적 질서와 원심적 자유를 함께 유지하고자 한다. 과거를 존중하면서 미래에 대한 비전을 잃지 않는다. 전통은 오히려 미래를 여는 힘이 된다. 근거 있는 새로움이 이로써 가능하다. 동양고전에서 흔히 말하는 온고지신(溫故知新) 혹은 법고창신(法古創新)으로 이것은 요약될 수 있다.

 21세기는 가위적 세계관을 가진 인간을 요구한다. 공자는 비천한 사람이 나에게 물으면, 그가 아무리 어리석다 하더라도 그 질문의 양 끝을 두드려 자세히 가르쳐준다(論語)’라고 했다. 여기서 양 끝이라고 한 것은 종시(終始)와 본말(本末), 혹은 상하(上下)와 정조(精粗) 등을 의미한다. 중용은 바로 이 양 끝을 조절하여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는 일이다. ‘천하와 국가도 평정할 수 있고, 벼슬도 버릴 수 있으며 흰 칼날도 밟을 수 있지만 중용은 하기 어렵다(中庸)’라고 했듯이, 이 중용을 실천하기란 참으로 쉽지가 않다.

 요즘 새정부의 한반도 대운하 기획으로 낙동강이 뜨겁다. 여러 곳에서 낙동강을 연구하겠다고 나서기도 한다. 낙동강은 태백산 황지(黃池)의 구심력과 드넓은 남해의 원심력 사이에서 양 끝을 동시에 조절하는 중용지도(中庸之道)를 알고 있다. 가위적 세계관을 갖고 있는 셈이다. 영남사람들은 낙동강 유역에서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갔다. 나루터와 주막을 중심으로 기층민의 일상이 이루어졌으며, 누정과 유선(遊船)을 통해서 사대부문화가 구축되었다.

 산이 자문화의 독자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작용을 한다면, 강은 서로 다른 문화를 소통?상생케 한다. 역시 중용의 미덕이다. 일제강점기에 신작로(新作路)를 만들기 전에는 대부분의 물류가 강을 통해 운반되었다. 이에 따라 낙동강 유역에는 장시(場市)가 번성하였으며 영남사람의 삶은 더욱 풍요로워졌다. 그런데, 난데없는 한반도 대운하 기획으로 낙동강이 위태롭게 되었다. 을숙도를 날아드는 철새들의 날갯짓도, 낙동강이 갖고 있는 아름다운 기억도 함께 위태롭게 되었다.

정우락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