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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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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남문화연구원   |  등록일 16-03-10 15:37   |  조회 1,498회

제20호: 파계사에서 듣는 무언 설법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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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공산 파계사에 가면 원통전 좌우에 설선당(說禪堂)과 적묵당(?)이 있다. 설선은 ()’()’한다는 것이니 설법(說法)을 의미한다. 이 건물은 현재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으니 이유가 있는 것이라 하겠다. 설선당 맞은편에는 적묵당이 있다. 적묵은 고요히() 침묵(?)한다는 것이니 참선을 뜻한다. 파계사에 올 때마다 설선의 언어와 적묵의 침묵으로 팽팽한 긴장을 느낀다. 설선당에서는 끊임없이 부처님의 진리를 언어로 전해야 한다고 하고, 적묵당에서는 부처님의 진리를 참선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고 한다. 이 둘이 분명 서로 대립되어 있으나 파계사에서는 언어와 침묵을 모두 주장한다. 일찍이 석가는 49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여러 곳을 다니며 설법하였으나 그 스스로는 한 마디도 설법한 것이 없다고 했다. 설법했다는 것은 무엇이며, 설법하지 않았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선가(禪家)에서는 언어와 침묵 가운데 침묵이 더욱 강조된다. ‘무설진설 유설가설((無說眞說 有說假說)’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다. , 침묵이 참된 말이며 언어는 거짓의 말이라는 것이다. 아래로 향하는 말은 여러 중생들의 능력에 따라 수만 갈래로 분석?해설되어야 하지만 위로 통하는 말은 한 글자도 필요가 없다. 이 때문에 선사들은 ‘40여 년간 공적을 쌓았으나(四十餘年累積功), 거북 털과 토끼 뿔이 허공에 가득 찼구나(龜毛兎角滿虛空). 한겨울 섣달 눈이 펑펑 쏟아져(一冬臘雪垂垂下), 큰 화로 붉은 불꽃 가운데로 떨어지는구나(落在洪爐紅?).’라는 선시를 지을 수 있었다. 오랜 설법이 거북의 털과 토끼의 뿔과 같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 속으로 내리는 눈으로 비유하여, 참된 진리는 언어를 떠나 있다는 것을 보였다.

 쌍림 부대사(雙林 傅大師)에 관한 이야기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쌍림 부대사는 제자들을 지도하되 설법을 하지 않았다. 제자들은 스님께서는 왜 설법을 하지 않으십니까? 대중과 신도들이 모두 스님의 설법을 참으로 듣고 싶어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그는 너희들이 그처럼 나의 설법을 갈망한다 하니 날짜를 정하고 법연을 차려 놓아라. 내 너희를 위하여 설법하리라.”라고 하였다. 제자들은 너무도 반가워 우리 스님께서 언제 어디서 설법을 한다고 방방곡곡에 대대적인 홍보를 하였다. 설법할 날, 승려 대중과 남녀 신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긴장한 대중 앞에 쌍림 부대사가 나타나자 대중은 대사의 입에 청신경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쌍림 부대사는 한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리고 슬며시 법상을 내려오더니 법당 문을 나가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기대에 부풀어 있었던 대중은 몹시 실망한 채 집으로 돌아갔고 행사를 준비한 그의 제자는 화가 나서 대사에게 따져 물었다. “스님께서는 설법을 해 주신다고 하시고서는 어찌하여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자 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경전을 강의하는 것은 강사나 법사가 하는 일이다. 나는 선객이니 좌선 입정하여 무언 설법(無言 說法)을 한 것이다.”

 파계사는 참으로 깨끗하면서 조용한 절이다. 경내 어느 곳에 앉아도 저절로 명상에 잠길 수 있을 것 같다. 원통전 뜰에 앉아 설선당과 적묵당을 보면서 팔공산이 들려주는 사자후 같은 무언의 설법을 들어보라. 팔공 선사가 언어를 통하지 않고 전해주는 그 내밀한 이야기가 바로 진언이다. 무자년에는 수많은 물거품으로 떠도는 언어들보다는 진언을 자주 들을 수 있는 그런 깊이와 여유가 우리들 모두에게 있으면 좋겠다.

정우락(경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