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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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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남문화연구원   |  등록일 16-03-10 15:36   |  조회 1,485회

제19호: 중암암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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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암암(中巖庵)이란 이름의 암자가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영천에 소재한 은해사(銀海寺) 소속의 여러 암자 가운데서도 이름이 비교적 덜 알려졌기 때문일 터이다. 그러나 이곳은 현재의 실정과는 다르게 어떤 암자보다도 가장 유서가 깊고 재미있는 역사적 배경을 간직한 곳으로 손꼽힌다. 그곳에는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3층 석탑이 자리하고 그 주변에는 당시의 기와가 곳곳에 산재하여 있어, 이를 입증해 준다.

 여러 해 전 대구문화방송으로부터 프로그램 제작을 도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대구 경북 일원에서 일반인들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적지로서 가 볼 만한 곳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다. 3주에 한 번씩 하여 6개월쯤 방영되어 대상지가 여러 곳 선정되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로 중암암을 넣었다. 이후 중암암 소개가 TV에 방영되자마자 전례 없이 많은 방문객들이 그곳을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매스컴의 대단한 위력을 절감하였다. 중앙암은 동서로 20km 길게 뻗친 팔공산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암자 바로 뒤의 봉우리에서 사위(四圍)가 훤히 트여 경관이 상당히 좋을 뿐만 아니라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어 한번쯤 찾아볼 만한 곳으로 꼭 권유하고 싶은 곳이다.

중암암은 김유신이 화랑으로서 17세 되던 해인 611년 삼국 통합의 웅지를 품고 찾아서 수련하였다는 수도처(修道處)가 자리한 곳이다. 그때 난승이라는 이름의 도인이 나타나 어떤 비법을 전수해 주었다고 한다. 난승이 비법을 발설하면 재앙이 김유신에게 미치리라 경고한 탓인지 그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과거 오래도록 김유신의 첫 수도처를 경주의 건천에 있는 단석산으로 간주하였으나 최근 그것이 아님이 밝혀졌다. 왜냐하면 김유신이 수도한 곳은 중악 석굴이라고 명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악은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팔공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김유신은 612년에 경주의 열박산에 들어가 다시 수도하거니와 이때 하늘로부터 휴대한 보검에 정기가 내려 바위를 치니 반으로 갈라졌다는 전승이 있다. 이로 미루어 짐작하면 단석산은 바로 이때의 수도처일지 모른다. 김유신이 고구려 첩자인 백석의 꼬임에 빠져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하였을 때 영천 골화의 산신이 나타나 구원해 주었다는 설화도 중암암이 김유신의 수도처와 관련됨을 시사한다.

 중앙암 바로 뒤쪽에는 커다란 바위산이 있다. 큰 바위들 사이에는 한 사람이 옆으로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정도의 틈이 나 있는데 김유신은 그곳에서 몸을 다듬었다고 전해진다. 바위틈 사이가 좁아 뚱보는 통과하기가 쉽지 않다. 한때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던 대학 시절에는 필자도 그 틈을 날쌔게 통과하였는데, 최근에 옛 생각만으로 통과하려다 끼어 죽을 뻔한 적이 있다. 바로 인근에는 원효바위 혹은 삼인암(三印岩)이라 불리는 넓적한 바위가 있으며 이는 참선용으로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아래에는 상당히 넓은 공간이 있는데 팔공산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여든다고 한다. 그래서 운기(運氣)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수련 장소로 종종 활용한다. 이곳에는 항시 따뜻한 기운이 감돌아 겨울철에는 눈이 내려도 빨리 녹아, 수행자들이 텐트를 치고 숙박을 하곤 한다. 정상부에는 만년송으로 불리는, 수령이 수백 년 된 소나무가 좁은 바위 틈새에 뿌리내려 거목으로 자라 있는데, 그 풍채가 일품이다. 고개를 넘어 반대편으로 100여 미터 내려가면 김유신이 이용하였다는 장군샘이 있다. 이곳의 물은 지금도 깨끗하며 맛도 매우 좋다.

 이제 벌써 가을이 깊어져 겨울의 문턱에 들어섰다. 다소 때늦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그 나름의 정취를 즐길 만하므로 한번 가서 직접 확인해 보기 바란다

 

주보돈(경북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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