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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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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남문화연구원   |  등록일 16-03-10 15:34   |  조회 1,652회

제17호: 벽오동 아래서 봉황을 기다리며

본문

​​ 연구실 밖, 일렬로 늘어선 벽오동이 푸른 음과 노란 음의 중간쯤으로 거문고의 줄을 고르고, 그 너머 플라타너스가 넓은 잎을 흔들며 커다란 동심원으로 내려앉는다. 가을이 이렇게 깊어가고 있다. 오동나무를 보고 있노라면 봉황이 춤추며 내려앉을 것만 같다. 누가 지었는지 모를 시조에,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려터니, 내 심은 탓인지 기다려도 아니 오고, 밤중에 일편명월(一片明月)만 빈가지에 걸렸에라라 했으니 그도 봉황을 기다렸던 모양이다.

 우리 경북대학교에서 10분 거리에 대구시 동구 봉무동이 있다. 봉이 춤춘다는 뜻의 동명이다. 요즈음 봉무동은 봉무공원이 있어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단산지를 산책하며 사색에 빠져드는 사람들도 있다. 봉무공원 근처에 예로부터 오동나무가 많아 이를 동수(桐藪)’라 불렀다. 이 때문에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에게 참패한 전투를 동수대회전(桐藪大會戰)이라 하였다. 장절공 신숭겸이 이 전투에서 죽었고 그 유적이 파계사로 접어드는 길목에 있는 표충단이다.

 봉무동에는 현존하는 대구 유일의 조선조 서당(書堂)이 있다. 문화재 자료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는 독암서당(獨巖書堂)’이 그것이다. 이 지역에는 이른 시기부터 경주 최씨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 이들은 자제들을 가르치기 위한 서당이 필요했을 터이고, 1865(고종2)에는 바야흐로 독암서당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서당의 이름을 독암이라 한 것은 왕건이 피신해 홀로 앉아 있었다는 독좌암(獨坐巖)’이 근처에 있기 때문이다.

 불로동에서 팔공산 쪽으로 약 1km정도 가면 좌측의 주유소 뒤로 불쑥 튀어나온 야산이 있는데 바로 봉무토성이다. 이 토성의 동쪽 기슭에 봉무정이 있다. 이 정자는 1875년에 세웠으며 현재 유형문화제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봉무정은 최상룡(崔象龍)이 건립한 것인데, 초기에는 이 지역의 행정을 담당했던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봉무정은 개인이 건립한 공공건물이란 점에서 그 의미가 특별하다고 하겠다.

 최상룡은 호가 봉촌(鳳村)이다. 그는 독암서당에서 강학활동을 하기도 했으며, 봉무정을 중심으로 향약(鄕約)을 만들어 이 지역의 주민 교화에 대단한 열정을 보였다. 그가 살았던 19세기는 군역 등 부세의 과중으로 말미암아 농민들은 유망하고 이로 인해 풍속은 문란해졌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최상룡은 대구 봉무동이 직면한 다양한 문제를 향약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가 ?봉무동동규(鳳舞洞洞規)?를 제정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동화사(桐華寺)오동나무 꽃 절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493년 극달(極達)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 하다가 832년 심지(心地)에 의해 중창되었다. 중창 될 때 겨울철인데도 절 주위에 오동나무 꽃이 만발하였으므로 동화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동화사 대웅전 앞의 누각이름은 봉서루(鳳棲樓). 봉이 오동나무에만 앉는다는 생각이 반영된 것은 물론이다. 그 아래 커다란 바위가 있고 바위 위에 둥근 돌 셋이 있는데, 봉황의 알이라고 한다.

 봉황은 성군이 세상에 출현할 때 나타난다는 영조(靈鳥). 오동나무에 살면서 예천(醴川)을 마시고 대나무 열매를 먹는다고 한다. 오색의 깃털을 지니고 오음에 맞는 노래를 부르며 수많은 새의 왕으로서 칭송을 받는다고 한다. 얼마 후 성군을 뽑는 대통령 선거가 있다. 그러나 벌써부터 온갖 비방들이 난무하여 ()’은 더욱 요원해지는 것 같다. 동화사 봉서루 아래에 있는 봉황의 알! 저 돌에 언제 생기가 돌아 봉황이 알을 깨고 나와 성군의 출현을 축하하며 봉무(鳳舞)를 할는지.

정우락 교수(경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