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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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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남문화연구원   |  등록일 16-03-10 15:31   |  조회 1,511회

제15호: 비슬산과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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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경북대학교 캠퍼스 내부에서 가장 자랑할 만한 곳을 손꼽는다면 아무래도 박물관 앞 의 뜰이 아닐까 싶다. 월파원으로 불리는 박물관 정원 이곳저곳에는 2백여 점에 달하는 석물(石物)들이 산재하여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어 대단히 아름다운 곳으로 정평이 나 있다. 대학에서 거의 매일을 보내는 우리들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별다른 감흥을 잘 느끼지 못하지만, 바깥에서 이따금씩 대학에 들리는 손님들은 정원의 아름다움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늘어놓는다. 다른 대학들도 본받아 비슷하게 정원 가꾸기를 시도하지만 아무래도 그 수준은 턱없이 미치지 못한다. 그것은 이 정원 자체가 상당히 오래도록 꾸준히 가꾸어온 탓도 물론 있겠지만 이곳에 자리한 석물들이 전부 오랜 동안 땀과 손때가 묻어 조상의 혼이 깃든 진품들이기 때문이다(, 정원 귀퉁이의 벚나무 아래쪽에 자리한 흥선대원군의 척화비는 예외이다). 

 

 석물 가운데, 본관 방면에서 정원의 중앙부를 가로질러 박물관 쪽으로 올라가는 바로 입구쯤에 큰 탑 두 개가 남북으로 대치하여 서로 자태를 뽐내는 듯 자리하고 있다. 그것이 통일기의 신라 석탑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구조와 규모이다. 두 탑은 마치 쌍둥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규모나 모습이 닮았다. 북편 탑의 출처는 잘 알 수가 없으나, 남쪽의 것은 원래 비슬산 자락인 월배 방면의 이른바 남평 문 씨 세거지로 불리는 곳에 있던 인흥사라는 절터에서 옮겨다 놓은 것이다. 원래 인흥사라 불리던 절의 터가 있던 곳에 남평 문 씨 사람들이 이주하여 자리 잡아 갔다. 그리하여 현재 그곳이 절터임을 짐작케 하는 것은 거의 없을 정도로 원형이 사라졌으며 산재한 몇몇 석재들만 과거의 풍상을 웅변해 주고 있었다. 그 가운데 원형이 될 만한 탑재를 수습하여 1960년 우리 대학으로 가지고 와서 복원한 것이 바로 이 석탑이다. 이 탑 주변을 왔다 갔다 하면서도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그냥 지나치기가 일쑤다. 안내문을 제대로 읽고 지나가는 학생들도 거의 없음은 물론이다. 형편이 그럴진대 이 탑이 저 유명한 삼국유사의 찬자인 일연 선사와 깊이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는 사람은 과연 있기나 할까?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일연은 1206년 대구 인근의 경산에서 출생하였다. 작년은 그의 탄신 800주년이 되는 해였으며, 그가 입적한, 군위 소재의 인각사를 중심으로 다채로운 행사가 열렸다. 일연이 출가한 나이가 9세였으니 경산은 출생지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는 광주 무량사에 잠시 머물다가 강원도 진전사에서 계를 받아 승려가 되었다. 22세에 승과에 합격한 뒤 이후 단속적으로 거주한 곳이 비슬산 자락이다. 일연이 비슬산(당시에는 包山이라 불렀다.)에서 산 기간은 전후 약 30년에 달한다. 일연이 대구에서 오래도록 살았다는 사실조차 아는 사람이 별로 많지가 않다. 옥포의 용연사나 비슬산 남쪽인 청도 각북면의 용천사, 대견사를 비롯한 비슬산 곳곳의 대소 사찰들은 모두 일연의 발길이 닿았던 곳으로 손꼽힌다. 삼국유사에서도 그런 흔적이 여기저기 찾을 수 있다. 그 중 가장 중심된 곳은 바로 인흥사였다. 인각사에 세워져 있는 일연 선사 비문에 따르면 이곳에는 스님의 강론을 듣기 위하여 일시에 3천여 명의 학승들이 모여들기도 하였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어떠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인흥사는 지금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형편이지만 고려 후기에는 엄청난 거찰이었음에 세월의 허망함을 느낄 수 있다.

 

 먼 길도 한걸음으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알 듯 말 듯한 진리도 결코 먼 곳에 있지 않다. 바로 우리 발밑에 있다. 주변에 대한 관심이 모든 출발의 근원임을 다시 한번 새겨본다.

주보돈(경북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