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itute of Youngnam Culture 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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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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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남문화연구원   |  등록일 16-03-10 15:29   |  조회 1,729회

제13호: 개울과 바다 혹은 강의 영남학

본문

​​ 우리는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으로 흔히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을 떠올린다. 이들은 모두 경상도 지역에서 1501년에 태어났으니 닭띠로 동갑이다. 이들은 모두 닭이 어둠을 몰아내고 밝음을 불러오듯이 한국 지성사에 문명의 빛을 던졌다. 이 때문에 실학자 성호 이익은 퇴계와 남명이 학단을 열고 인의(仁義)로써 제자를 가르칠 때를 들어 우리 문명의 극치는 여기서 이루어졌도다!”라고 외칠 수 있었다.

 퇴계(退溪)개울, 남명(南冥)바다를 지향한다. 개울에는 수양론적 궁극점이 있다. 물이 샘솟는 원두(源頭)가 있기 때문이다. 퇴계는 원두 가까이, 즉 개울로 물러나 천리가 유행하는 도체를 체득하고자 했다. 이에 비해 남명은 대붕과 같은 거대 자아를 지니고 절대자유를 상징하는 남쪽 바다에서 소요하고자 했다. 그러니 퇴계는 강의 상류에서 개울과 같은 맑은 순수로, 남명은 하류에서 바다와 같은 광대한 자유로 각각 자신의 정신 경계를 구가하였던 것이다.

 낙동강의 ’, ‘는 서로 밀착되어 있다. 따라서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좌상하우를 구분하여 영남을 이해하는 방식이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일정한 성과를 획득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영남 사람들이 강의 상하를 오르내리며 삶을 영위하였고, 좌우를 넘나들며 보다 큰 그들의 문화를 만들어 갔다는 사실을 외면하면 안 된다.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낙동강은 소통과 통합의 강이라고 주장한다. 16세기에는 워낙 걸출한 두 학자가 강을 사이에 두고 있었으므로 경계를 의미하는 강이었지만, 그 이후에는 사정이 다르다. 낙동강 연안 및 중류 지역에 거점을 마련하고 퇴계와 남명을 함께 스승으로 모시면서도 이들의 학문을 발전적으로 성취한 일군의 학자들이 영남학을 선도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퇴계의 개울과 남명의 바다를 포괄적으로 극복하면서 을 중심에 두고 사유하고 활동했다.

 낙동강 중류의 이른바 강안(江岸) 지역에는 상주·선산·성주·고령·대구·밀양·창녕 등 다양한 지역이 있으며 대구는 그 가운데서도 중심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퇴계와 남명의 제자인 한강 정구(寒岡 鄭逑)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강안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미수 허목을 통해 근기 실학을 성립시킨 인물이다. 현존 최고의 지방지함주지를 편찬하여 지역 문화 창달에 크게 공헌하였고, 인문학의 실용주의 노선을 구축하여 심학과 예학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한강은 만년에 대구의 사수동에 사양정사(泗陽精舍)를 지어놓고 제자들을 길렀다. 괴헌 곽재겸, 낙재 서사원, 모당 손처눌, 양직당 도성유, 대암 최동집 등의 허다한 대구 사람들이 그의 문정으로 모여들었다. 한강은 북구 연경동에 있었던 연경서원(硏經書院)에 퇴계와 함께 배향되기도 했으며, 화원의 인흥마을에 동계정(東溪亭)이라는 유적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제자들 역시 대구에 소재한 유호서원, 이강서원, 청호서원, 용호서원, 병암서원 등 다양한 서원에 제향되었고, 그 후손들은 현재 대구를 중심으로 세거하고 있다.

 한강이 만년을 보낸 사수동에 한강공원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여기에 유허비와 시비 등이 건립될 것이라 한다. 이를 계기로 개울바다를 중심으로 읽던 영남학을 넘어 을 중심으로 영남의 지성사가 새롭게 읽혀지기를 희망한다. 이 과정에서 낙동강이 소통과 통합의 강이 되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의 의미와 기능을 잊고 살아왔다. ‘개울에서 시작하였으나 바다를 만드는 위대한 지혜를 지녔으며, 자신의 가슴을 열어 생민을 살리는 실용주의자이기도 하다.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어떤 계시로 흐르는 저 은빛의 낙동강을 만나 볼 일이다.

정우락(경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