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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남문화연구원   |  등록일 16-03-10 15:27   |  조회 1,719회

제12호: 이육사와 조양회관

본문

​​ 이육사(李陸史)는 여러 가지로 비밀에 쌓인 인물이다. 그의 정확한 행적은 아직도 분명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여러 방면의 탐색이 축적되면서 그의 면모도 하나씩 밝혀지고 있다. 그 중 하나가 그의 중국 학력이다. 이육사의 신문조서에서 북경 중국대학 사회학과 중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그동안 중국대학이 확인되지 않아 그 기록의 신빙성이 의심되었다. 그러나 최근에 북경 천안문광장 서쪽에 있는 29중학교가 옛 중국대학임이 확인되어 이육사의 전기 연구에 탄력이 붙게 되었다.

 

 이육사는 주로 대구에서 사회운동을 하였다. 192016세쯤에 안동에서 대구 남산동으로 가족 전체가 이사하여,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에게서 그는 그림을 배우고, 동생 이원일은 글씨를 배웠다고 한다. 이후 일본과 중국을 다녀온 후 대구의 조양회관을 중심으로 사회운동을 하여 일본 경찰에게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그래서 항일 사건이 터질 때마다 검거되는 고난을 당하였다. 192710, 장진홍 의거에 연루되어 19295월에 무혐의로 풀려난 것을 계기로, 대구청년동맹 관련(1930.1.), 삼일절 관련(1930.3.), 대구 격문사건 관련(1931.1.) 등 구속과 출소를 거듭하였다.

 

 항일단체인 대동청년단을 조직한 바 있는 서상일이 자신의 부동산을 처분하여 완공한 조양회관은 대구 항일문화운동의 거점이었다. 수많은 청년을 교육하고 민족사상을 고취함을 목적으로 삼은 이곳,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에서 최남선의 조선사 강좌나 한글 교육 등 각종 행사가 성황을 이루었다. 여기에 대구구락부, 청년회, 대구운동협회, 신간회 대구지국 등 여러 사회단체가 자리를 잡으면서 그 성격이 더욱 분명해졌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일제가 조양회관을 폐쇄시킨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육사는 이곳을 통하여 당대의 사회운동 지도자들과 접촉하며 구체적인 실천 방향에 대해 고민하였을 것이다. 서상일, 이정기, 안희제 등과 교분도 이곳과의 인연으로 가능하였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이육사가 19302월에 중외일보 대구지국 기자가 된 것도 그런 인연에 의한 것은 아니었을까. 당시 중외일보 사장은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던 백산 안희제였던 것이다. 그의 잦은 중국행 역시 이들의 행보와 연계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육사는 193010별건곤이활(대구 二六四)’이라는 이름으로 대구사회단체개관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이활(李活)이라는 이름이 이육사임을 보여주는 이 글에서 그는 대구의 사회단체인 대구청년동맹, 대구소년동맹, 신간회 대구지회, 근우회 대구지회, 경북 형평사 대구지사, 경북청년연맹 등을 나열하며 이들의 분투를 바라고 있다. 이런 글은 조양회관을 통하여 대구의 사회운동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시를 생각하는 것도 행동이라 한 실천적 문학관도 여기에 기원이 있지 않을까.

 

 조양회관은 원래 달성공원 정문 앞에 있었지만, 지금은 망우공원으로 본관이 옮겨져 광복회관으로 불리고 있다. 지금도 이 건물 앞에 서서 계단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당시 이 건물을 드나들며 민족의 문제를 고민하던 청년들의 확신에 찬 목소리와 힘찬 발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들의 정신을 이을 새로운 청년들은 대구의 어느 계단을 소란스럽게 할 것인가? 육사는 그들을 간절하게 기다리며 앞의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항상 전위에 나선 용자(勇者)가 희생을 당하면 연()해 곧 진영을 지키고 후임을 계승할 만한 투사가 끊어지지 않아야 할 것이니, 새로운 용자여, 어서 많이 나오라.”

 

박현수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