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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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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남문화연구원   |  등록일 16-03-10 15:27   |  조회 1,831회

제11호: 팔공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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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수 년 전의 일로 기억되는데, 월간 잡지 ()에 산행을 즐기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앙케트 결과가 실린 적이 있다. 질문 가운데 하나는 전국의 유명한 산 가운데 하루 등산 코스로 다시 꼭 가 보고 싶은 곳은?”이었다. 집계 결과 1위로 손꼽힌 곳이 바로 팔공산이었다. 이처럼 팔공산은 다른 지역 사람들이 대구라 하면 저절로 떠올리게 될 정도의 명산으로 자리 잡았다. 직접 산행을 해 보면 팔공산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또 팔공산은 산행하기에 좋은 만큼이나 무척 흥미로운 역사와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1170여 미터 높이의 팔공산은 흔히 중봉으로 불리는 비로봉을 정점으로 서봉과 동봉을 협시(脇侍)로 둔 형상을 하고 있으며 동서로 길게 펼쳐져 있다. 서쪽 끝자락의 가산산성에서 동쪽으로 은해사의 말사인 중암암(돌구무절)에 이르기까지 장장 약 20km의 산자락이 대구의 북쪽을 병풍처럼 둘러친 모습을 하고 있다. 골짜기는 자칫 길을 잃어 헤맬 정도로 깊다. 오랜 역사를 지닌 명찰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동화사를 비롯하여 부인사, 파계사, 송림사, 은해사, 선본사 등을 팔공산의 명찰로 손꼽을 수 있겠다. 이 밖에 크고 작은 사찰 수백 채가 팔공산 자락 곳곳에 흩어져 있다고 하니, 우리 역사에서 팔공산이 신앙의 대상지로 기능한 정도가 쉽게 짐작이 간다.

 

 이처럼 팔공산은 불교를 비롯한 전통 신앙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 기원은 상당히 거슬러 올라갈 터이지만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것은 신라가 삼국을 통합하던 무렵의 일이다. 한편, 당시에는 이 산이 팔공산으로 불리지 않았다.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에 이르러서이다. 그 전에는 공산(公山), 중악(中岳), 부악(父岳) 등으로 불렸다. 공산은 공식적인 산이라는 의미이며 국가에 소속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중악은 신라가 삼국을 통합한 뒤 두드러진 산악숭배와 관련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통일 직후, 중국의 오악(五岳) 사상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이 바로 신라의 오악이다. 신라에서는 팔공산을 중악으로 하고, 토함산을 동악, 계룡산을 서악, 지리산을 남악, 태백산을 북악으로 삼았다. 이들 오악은 경주 부근의 삼산(三山)과 함께 가장 중시된 국가 제사의 대상지였다. 그 가운데 팔공산이 중악이었다는 것은 신라 국가가 이 산을 얼마나 중시하였는지 대변한다. 중봉의 꼭대기에는 돌로 쌓은 제단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런데 팔공산을 부악이라 이름한 것이 특히 눈길을 끈다. 애초에는 신라인들이 팔공산을 부악이라 부르지 않았을까 싶다. 부악은 아버지산이라는 뜻이다. 왜 신라 사람들은 팔공산을 하필 부악이라 불렀을까. 지난 호의 이 난에서 대구가 689년 천도의 대상지로 선정된 것이 신라의 김 씨 족단의 발상지이기 때문일지 모른다고 추정한 적이 있다. 팔공산을 굳이 부악이라 한 것은 그를 방증하는 또 하나의 사례이다. 김 씨 족단에서는 경주로 들어가기에 앞서 대구 부근에 정착하였다. 그래서 팔공산을 아버지산이라 불렀던 것이 아닌가 싶다. 팔공산은 이처럼 산악숭배의 대상지로 출발하였으나, 9세기에 이르러 헌덕왕의 아들인 심지왕사가 동화사를 창건한 후 불교 신앙의 중심지로 뿌리내려 갔다.

 

 대구에서 평생을 지내도 팔공산에 올라보지 않은 사람이 많다. 이는 비단 삶이 팍팍하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한 탓일 것이다. 아직 팔공산에 올라 보지 못한 학생이 있다면, 물통 하나를 허리에 차고 동봉에 올라 초가을의 정취를 만끽해 보기 바란다. 나중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발길이 그리로 돌려지리라.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