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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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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남문화연구원   |  등록일 16-03-10 16:13   |  조회 3,916회

제54호: 신목(神木), 소나무에 신이 깃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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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문화는 다양한 마을 문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 영남 지역도 마을 단위로 생산과 소비의 순환고리가 형성되어 있다. 영남의 마을공동체 문화 중에서 오늘날 되살려야 풍속이 있다면 마을의 안녕을 기원했던 동신제가 아닐까 한다. 마을신이 살고 있는 신령한 나무 이야기는 매우 풍부하다. 신목은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정신적 지주이면서도 재앙을 초래하는 양면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신목을 해코지하면 어김없이 동티가 난다.

 합천 나곡마을의 소나무는 영남의 신목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소문이 자자하다. 이 소나무는 천연기념물 제289호로 지정되어 있다. 소나무를 찾아서 헐떡거리는 숨을 참으며 몇 구비를 돌고 돌았다. 그곳은 해발 350미터에 자리한 오지로 현대 문명과 단절된 느낌이 들었다. 소나무는 부채를 편 모양으로 논 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 소나무의 키는 17.5미터, 가슴둘레는 5.5미터이다. 푸른 솔잎 사이로 보이는 붉은 가지를 보고 탄성을 질렀다.

 

 1613년 조선 중기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모함 때문에 집안이 피해를 보았다. 그때 김제남의 친척이 도망쳐 이 소나무 밑에 초가를 짓고 살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소나무 나이는 무려 400살 정도로 추정된다. 소나무 신목에는 역적으로 몰려 죽은 역사적 슬픈 이야기가 얽혀있다. 대부분의 신목에는 기쁨보다 슬픔이 많은 것은 신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우람한 소나무는 생전 처음이다. 멀리서도 한 눈에 반해버린 소나무에 이끌려 가까이 다가갔다. 반가운 마음에 소나무를 힘껏 안았다. 소나무의 둘레가 굵어서 내가 소나무 품에 안겼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신목의 장수 비결이 궁금해 다시 안고 소나무와 대화했다. 소나무는 군자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한 순간에 깨닫게 해주었다. 한 여름의 무더위를 씻어주는 한 줄기 소나기처럼 수려한 기상이 우주를 떠받치고 있는 듯하다.

 소나무는 세월의 풍상을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나곡마을을 지켜준 신목이다. 주민들은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 아침에 소나무 아래서 동제를 지내고 있다. 마을주민들은 소나무를 할매 당산나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마을 뒷산에 할배 당산나무도 있을 것이다. 배용수 할아버지의 안내로 할배 소나무를 보았다. 안타깝게도 할배 소나무는 수명을 다했지만 금줄을 두른 신목의 기능은 그대로이다. 생명을 다해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음에도 신목으로 섬김을 받는 할배 당산 소나무의 신령스러운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산업화의 물결로 나곡마을 동신제를 잠시 중단한 뒤부터 마을주민의 꿈에 소나무가 자주 나타나 불길한 예언을 했다. 그래서 주민들이 다시 동신제를 지낸 뒤부터 마을의 우환은 사라졌다고 한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주민들은 할매와 할배 소나무의 은덕으로 믿고 있다. 소나무 신목은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지켜주는 큰 어르신이다.

 마을주민 김분순(89) 할머니는 토박이다. 할머니의 기억에는 소나무의 모습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소나무의 수려한 기품은 변함 없이 유지되고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나곡마을의 소나무는 세상의 풍파에 시달린 사람들에게 무한한 용기와 깨달음을 주는 고마운 스승이다. 공동체문화의 상징인 소나무 신목은 마을문화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준다.

소나무 신이시여, 세상의 모든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빕니다.

 

김재웅(경북대 기초교육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