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호: 선산(善山)의_산유화(山有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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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 이중환 [李重煥, 1690~1756]은 그의 저술인 ≪택리지(擇里志)》에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라고 하였다. 예로부터 선산[구미시,선산군]은 야은 길재 선생의 뒤를 이은 충절의 고장이요, 효자 열녀가 즐비한 효행의 고장이기도 하다. 이러한 곳 선산에 전해오는 노래 『산유화가』는 이 땅 민초들의 노래소리가 단순히 삶의 애환만을 토로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품은 그 땅의 예속(禮俗)이나 풍교(風敎) 등과 무관한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옛 선산의 군지인 일선지(一善誌)나, 이광정(李廣庭)의『눌은선생문집訥隱先生文集』, 엄경수(嚴慶遂)의 『부재일기孚齋日記』 및 증보문헌비고(권 106 악고 속악부 조) 등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남아 전한다.
숙종 무인(戊寅)년간 9월에 선산에 일찍이 과부가 되어 수절하고 있는 향랑(香娘)이라는 아녀자가 있었는데, 그 부모가 재혼을 강요함에 이를 이기지 못하여 길재 선생의 묘비가 있는 낙동강 가에서 슬픈 노래를 부르고 투신하였는데 그 노래가 <산유화가(山有花歌)>라는 기록이다.
하늘은 높고 높고 / 땅은 넓디 넓은데 / 이 한 몸 둘 데 없네
차라리 물속에 잠겨 / 고기뱃속에 묻힐거나
(天高而高 / 地廣而廣 / 此身無所容 / 無寧水相沈 / 長爲魚腹葬 )
이 노래에 얽힌 정절의 덕행은 후대 전해져 많은 시인 묵객들에 의해 노래되거나 차운(次韻)되어 오늘에 전한다. 이학규(李學逵)의 『영남악부嶺南樂府』, 신유한(申維翰)의 『청천집靑泉集』,윤정기(尹廷琦)의 『동환록東?錄』 등에 전하는데, ‘山有花’, ‘山有花歌’ ‘山有花曲’, ‘山有花女歌’,‘?娘謠’, 이덕무(李德懋)의 ‘香娘詩’, 이안중(李安中)의 ‘山有花’, ‘山有花曲’, 이노원(李魯元)의 ‘山有花曲’,‘山有花後曲’, 또 이유원(李裕元)의 ‘山有花’,이우신(李友信)의 ‘山有花’,김창협(金昌翕)의 ‘山有花三章’ 등등은 모두 향랑을 정절을 기린 시 작품들이다.
영남의 토속민요를 음악적으로 메(매)나리토리 가락의 노래라 일컫는데, 혹자는 이 메나리라는 말을 한자로 옮긴 것이 ‘산유화’라 하지만 이는 잘못이다. 메나리‘는 ’맨+아리(소리)‘라는 말로 장식이 없는 민소리라는 뜻이다. 경상도, 강원도 함경도의 우리나라 동부지역 민요가 꺾거나 맺거나 하는 화려한 기교 없이 밋밋하게 멋없이 부르는 소리이기에 메/매나리소리라는 말이 생겼다. 간혹 강원도에서 <모심기소리>를 『산유화』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메나리로 밋밋하게 부르기에 붙인 이름이다. 그리고 동국여지승람(권 26,백제가요 조)에 <산유화가>라는 남녀상열지사가 있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노래 또한 ‘향랑고사’의 이 노래와는 무관하다.
지금 선산지역에는 『산유화가』라는 민요는 사라졌으나 그 설화는 남아 전하고 있다.
김기현(경북대 국문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