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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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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남문화연구원   |  등록일 16-03-10 16:05   |  조회 2,447회

제46호: 안동 영호루(映湖樓)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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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에서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위쪽으로 가다가 남안동 IC에서 내려 다시 북으로 약 10킬로 남짓 가면 낙동강 변에 안동시가 눈앞에 나타난다. 강을 건너면 안동 시내이고, 강을 건너지 않고 곧장 강변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오른 쪽 나지막한 야산 위에 커다란 누정(樓亭)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진주의 촉석루(矗石樓)와 함께 영남의 3대 누정이라 일컬어진 영호루(映湖樓)이다

 

 영호루가 언제 어떻게 건립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서 자세하게 알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누정의 본래 위치가 현재 자리가 아니라 강 건너 맞은편, 즉 안동 시내를 흘러내린 당북천(堂北川)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시내 쪽 강변 삼거리 부근(유허비를 세워 놓았음)에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고려 충열왕 때(1274) 김방경(金方慶)이 지은 등영호루(登映湖樓)라는 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충열왕 이전에 건립한 것이 확실하며, 그렇다면 이 누정은 영남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누정이라고 할 만하다.

 

 영호루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고려 공민왕(恭愍王)과 관련이 깊다. 공민왕이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피해 안동에 왔을 때 안동읍성 남문(南門) 밖에 있던 영호루를 자주 찾았고, 그 아래 백사장에서 활쏘기를 하였으며, 낙동강에 배를 띄워 시름을 달래기도 하였다. 그래서 난이 평정되고 개성으로 돌아간 뒤 안동을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시켰고, ‘映湖樓’ 3자를 금으로 쓴 제액(題額)을 하사하였으며, 안동부에서 이에 걸맞게 누정의 규모를 크게 확장하여 마침내 영남의 명소가 되었던 것이다.

 

 영호루는 국왕의 친필 제액을 내건 유명한 곳일 뿐만 아니라 북서쪽 학가산(鶴駕山)과 안동 시내를 에워싼 영남산(映南山), 누정 앞에 펼쳐진 드넓은 낙동강이 잘 어우러진 명승지였다. 그리고 주변에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종가(宗家)가 즐비하였고, 그 곳에서 수준 높은 문인 학자들이 다수 배출되었으며, 동남 내륙지역에서 죽령을 통해 한양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래저래 이곳을 찾는 수많은 학자와 시인묵객들의 중요한 창작 공간 역할을 한 것이다.

 

 영호루에 올라 글을 지은 사람은 공민왕을 호종하여 이곳에 왔던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같은 고려시대 관리를 비롯하여, 경상감사로 안동 지방을 순행한 남공철(南公轍) 김극성(金克成), 안동부사로 부임한 최석정(崔錫鼎) 이현석(李玄錫) 등 중앙과 지방 관료가 가장 많았다. 그리고 안동 출신의 이현보(李賢輔) 이황(李滉) 권호문(權好文)이나 예천 출신의 권문해(權文海) 봉화 출신의 권두경(權斗經) 등 가까운 지역에 생활 근거를 둔 사람들이 많은 작품을 지었으며, 기타 각종 사연으로 이곳을 지나치거나 영호루 아래 뱃놀이를 하면서 지은 작품은 하나하나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영호루를 대상으로 지은 글은 종류도 다양하다. 시의 경우 오언이나 칠언율시가 중심이지만, 이색(李穡)24행 남공철(南公轍)18행의 장편시를 지었고, 서거정(徐居正)26행 가행체(歌行體)를 지었으며, 권두인(權斗寅)은 영호루부(暎湖樓賦)라는 부()를 지었다. 문장에 있어서도 백문보(白文寶)는 영호루금방기(映湖樓金榜記)를 지어 공민왕 관련 사적을 자세히 기록하였고, 김종직(金宗直) 이춘영(李春英) 등은 중수기(重修記)를 지어 사실을 기록하였으며, 성대중(成大中)은 영호루 제액의 후지(後識), 성해응(成海應)은 공민왕 필적(筆跡)에 대한 소견을 잡록(雜錄)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영호루는 이처럼 천년의 역사를 지닌 낙동강변의 대표적 문학 창작 공간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영호루는 역사의 향기를 상실하고 껍데기만 남은 형국이다. 낙동강 범람으로 여러 차례 수난을 겪다가 1970년 강 건너편 언덕으로 옮겼는데, 목조 건물이 콘크리트 구조물로, 남향 누각이 북향으로 바뀌었으며, 시판(詩板)도 대부분 2000년대에 새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저 유명한 황학루(黃鶴樓)와 등왕각(藤王閣)을 콘크리트 구조물에 엘리베이터가 오르내리도록 개조해 놓은 것과 다름없는,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황위주(경북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