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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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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남문화연구원   |  등록일 16-03-10 16:02   |  조회 2,213회

제43호: 황기로(黃耆老)와 매학정(梅鶴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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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부고속도로 구미 나들목을 빠져나가서 선산군 해평면 쪽으로 약 20분 정도 자동차를 달려가면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숭선대교(崇善大橋)라는 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를 건너기 직전에 우측으로 다리 밑을 돌아 들어가면 아름다운 낙동강 변에 작은 마을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조선시대 때 초서(草書)의 달인으로 널리 알려진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매학정(梅鶴亭)’이란 정자를 짓고 살던 터전이다

 

 매학정은 원래 황기로의 조부 황필이 처음 자리를 잡아 만년의 휴양지로 삼았던 곳이다. 황필이 세상을 떠난 후 황기로가 조부의 뜻을 받들어 이곳에 정자를 짓고 매학정이라 이름 지었다. 송나라 때 임포(林逋)가 속세를 떠나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해 매화를 심고 학을 키우며 사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매화를 아내 삼고 학을 자식삼아 산다고 해 매처학자(梅妻鶴子)’라 했는데, 황기로 역시 임포와 같은 삶을 살겠다고 해 뒷산을 고산(孤山), 정자를 매학정(梅鶴亭)이라 했던 것이다.

 

 황기로는 14살 때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할 정도로 재능이 탁월했다. 그러나 아버지 황계옥(黃季沃)이 조광조(趙光祖)를 탄핵한 사실을 알고는 세상에 나가 활동할 면목이 없다고 해벼슬을 포기하고 이곳에 묻혀 평생 초서(草書) 공부를 하며 살았다. 그래서 이전의 왕희지나 왕헌지와는 다른, 당나라 때 장욱(張旭)과 회소(懷素), 명나라 때 장필(張弼) 등이 즐겨 구사했던 예술적 초서체를 종합해 보통 사람이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휘갈겨 쓴 이른바 광초(狂草)라는 독특한 서체를 구사했으며, 마침내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경지를 성취해 조선의 초성(草聖)이라 일컬어졌다.

 

 황기로는 아들이 없고 딸만 하나 뒀는데, 그 딸을 평소 교분이 있던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동생 옥산(玉山) 이우(李瑀)와 결혼시켰다. 이우는 율곡 집안의 여러 형제 가운데 누이 이매창(李梅窓)과 함께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예술적 재능을 가장 정통으로 계승했으며, 글씨뿐만 아니라 시와 그림 거문고 연주까지 모두 탁월해 시서화금(詩書畵琴)의 사절(四絶)로 유명했다. 황기로는 이런 이우의 재능을 사랑해 그를 사위로 맞이했으며, 매학정을 포함한 일대의 터전도 모두 사위에게 물려줬다. 그래서 황기로 사후 매학정과 그 일원은 한산이씨 이우 집안의 터전이 됐다.

 

 한산이씨의 터전이 되고 난 뒤에도 매학정은 한 동안 예술적 명성을 지켜나갔다. 이우의 아들 이경절(李景節)이 아버지 이우와 외조부 황기로의 예술세계를 계승해 글씨와 그림 거문고 연주에 뛰어난 서화금(書畵琴)의 삼절(三絶)로 명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경절은 특히 꽃이나 풀 벌레 같은 화훼초충(花卉草蟲)을 잘 그렸는데, 그가 이런 그림을 그려 길에다 던지면 닭들이 모여들어 쪼아볼 정도였다는 일화가 있다.

 

 매학정은 이처럼 영남 일원에서 보기 드문 예술 활동의 터전이었다는 점에 우선 중요한 특징이 있다. 그리고 이우의 집안이 율곡 이래 서인계의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에 영남지역에 드문 서인 노론계의 근거지였다는 점에서도 특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우의 아들 이경절(李景節)은 폐모론을 반대한 서인이었고, 이경절의 손자 이동명(李東溟)은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삭탈관직을 당한 노론계 핵심이었으며, 노론의 영수 송시열(宋時烈)과 이의명이 각각 매학정시집(梅鶴亭詩集)의 발문을 짓고, 송시열의 제자 이민서(李敏敍) 이상(李翔) 임방과 증손자 송능상(宋能相), 김창협(金昌協)의 제자 이의현(李宜顯), 기타 김득신(金得臣) 남용익(南龍翼) 김석주(金錫胄) 조지겸(趙持謙) 등이 매학정과 관련된 글을 두루 남기고 있다는 것을 통해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매학정은 폐허와 다름없이 방치되어 있다. 정자 주변에는 울타리도 없고, 정자 남쪽 대문은 간곳없이 사라졌다. 학정(鶴汀) 이동명(李東溟)이 매학정 서쪽에 지었던 귀락당(歸樂堂)은 가정집으로 변개됐고, 귀락당 서쪽 매강서원(梅江書院)도 주춧돌만 잡초 속에 덩그러니 묻혀 있다.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영남 제일의 명승이라 칭송하던 곳, 황준량(黃俊良)과 이광려(李匡呂)가 매학정팔영(梅鶴亭八詠) 시를 지어 아름다움을 노래했던 그 터전이 이렇게 방치되는 현실을 어찌해야 좋을까?

황위주(경북대 한문학과 교수)​